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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舌)
- 네 언어의 한계는 곧 네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by Ludwig Wittgenstein
3549 bytes / 조회: 815 / 2021.12.28 20:37
잡설


21년 11월은 아마도 내가 집에서 독립한 이래 책을 한 권도 안 산 유일한 달이지 싶은데 당연하지만 이 시기엔 책을 못 읽었다. 그렇다고 텍스트를 아예 못 읽었다는 얘기는 아니고 정확히는 종이책을 못 읽었다는 얘기. 

 

책을 못 읽은 얘기를 쓰자니 얼마전에 모커뮤에서 읽은 글이 떠오른다. 

즐겨찾기 사이트 중 최근 방문이 뜸했던 커뮤니티에 얼마전에 오랜만에 들렀는데 마침 우리나라 독서 인구 대부분이 연간 책을 한 권도 안 산다는 어느 일간지의 기사로 관련 얘기가 한창이었다. 뉴스 기사 링크를 걸고 작성자가 쓴 글을 요약하면 순문학은 재미가 없고, 그래서 본인은 서브장르가 호황인 웹소설-이북 위주로 읽고 있고, 순문학은 젠체해서 싫고, 고리타분한 순문학의 소설적 기능에 의문이 들고, 결론은 순문학이 장르문학보다 재미도 없고 딱히 수준이 더 높지도 않는데 왜 대우를 해주는지 모르겠다- 는 전개였다. 이 글을 읽은 내 소감은, '이 양반은 문학이라는 대전제를 소설의 오락적 기능에 매몰시켰군.' 

 

한때 대한민국을 들었다 놨다 하며 베스트셀러를 넘어 드라마와 영화로 만들어져 공전의 히트를 치고 대중의 입에 오르내렸던 수많은 장르소설도 시간이 지나면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진다. 바로 장르소설이 가진 양날의 검이랄 수 있는 '유행성', '동시성' 때문인데 이는 동서양 막론하고 장르소설이 가지는 기능적 한계다. 

 

나는 순문학도 장르문학도 웹소설도 쇼핑몰 리뷰도 중고마켓 거래 문자도 하물며 거리의 입간판까지도 모두 다 재미있게 읽는 유사 활자중독자라 저걸 왜 읽냐, 저런 걸 왜 쓰지 라는 생각 같은 건 애초에 안 한다. 다만 잡식성 독서력의 산물로 (쓰는 것이든 읽는 것이든)소설은 쉽고 문학은 어렵다는 판단은 한다. 타인을 울리고 웃기는 건 쉽지만 타인의 의식에 티끌만한 흔적이라도 남기는 건 아주 아주 어렵다.

 

내 수준이 얕아서 내 책장에 장르소설/웹소설만 있는 게 아니란다, 주장하고 싶은 거면 이해 못할 바는 아니나 그 주장을 위해 굳이 순문학이 재미도 없고 지루하고 따분하다고 강조할 필요는 없다. 재미가 없으면, 호흡이 길면, 난해하면 소설이 아닌가? 이런 주장은 자칫 맛만 있으면 음식의 재료가 상했든, 먹는 장소가 쓰레기통 옆이든 상관 없다는 태도처럼 보인다.

 

문학은 장거리를 달리는 지구력이라면 소설은 단거리를 뛰는 순발력이다. 세상엔 많은 다양한 소설, 다양한 상상력을 가진 작가들이 있다. 다양하게 읽을 수 있다는 거, 얼마나 큰 축복인가. 그러니 우리는 다양하게 읽고, 다양하게 사고하고 다양하게 즐기면 되는 거다. 문맹이 아니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가장 쉽고 저렴한 지적 사치가 아닌가. 부디 마음껏 누리자.

 

덧. 그럼에도 여전히 내가 못 읽는 장르는 있다. 라노벨과 팬픽/알페스인데 개인적으로 무척 안타깝다. 뭐_ 여우의 신포도겠지만 미지의 영역을 남겨두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위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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