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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舌)
- 네 언어의 한계는 곧 네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by Ludwig Wittgenstein
9012 bytes / 조회: 504 / 2022.10.27 01:36
헤어질 결심 v. 화해할 결심


※ 최초 작성일자는 지난 8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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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 오후 <헤어질 결심> 각본집을 배송받아 책상 위에 얹어두고, 그날 저녁 별생각없이 눈앞에 있는 책을 습관처럼 펼쳤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마지막 페이지다. 그리고 이후 폭풍같은 주말을 보냈다.

 

마지막 장면이 어찌나 생생한지 마치 실사를 눈앞에서 본 것 같은 이미지 충격에 한동안 책을 들추다 영화 예매 사이트를 열었다. 하지만 여름 성수기를 앞두고 거대배급사들이 상영관을 죄다 틀어쥐었는지 상영관도 상영회차도 터무니 없이 적다. 내 편의에 맞춰 예매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아, 대형 스크린으로 보고 싶은데...

 

그리고 예의 '사흘'이 시작됐다. 내 혼잣말의 상대는 언제나처럼 M.

 

(첫째날)

'헤어질 결심' 각본을 읽었는데 어쩌고저쩌고.... 

M 그게 뭔데

박찬욱 신작 영화

 

(둘째날)

'헤어질 결심' 각본을 읽었는데 어쩌고저쩌고...

M 그게 뭔데

박찬욱 영화라고

 

(셋째날)

'헤어질 결심' 각본을 읽었는데 어쩌고저쩌고...

M 지금 얘기하는 게 뭔데

박찬욱 영화라니까!

 

사흘째, 드디어 M이 영화 제목을 외웠다. 그러니까 <헤어질 결심>이 영화 제목이라는 걸 마침내 인지했단 얘기다.

귀신도 못 속일 빠른 눈치를 장착한데다 스포일러에 초민감한 M에게 '영화를 볼 거면 유툽 리뷰 피할 것'을 미리 경고하고, '근데 이 영화는 내용이 스포가 아니라 장면이 스포야' 재차 강조하고.

 

사실 내 수다 중 각본은 1/3쯤이고 대부분 박찬욱 감독에 관한 거였다. 

사흘 내내 떠든 얘기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박 감독이랑 화해할 결심'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 나는 이제 드디어 박찬욱 감독과 화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박찬욱 감독을 '변태'라고 정의하는데,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첨언하자면 나는 문학계 변태로는 '프란츠 카프카'를 꼽는다. 

 

불호라고 말하고 다니는 것치고는 나는 데뷔작 <달은 해가 꾸는 꿈>을 포함해 박 감독의 영화를 거의 다 봤는데 <박쥐>이후론 안 봤다. 그러니까 <박쥐>, <아가씨>는 안 봤는데 박 감독의 필모 중 대중의 호평을 받는 대표작은 안 본 셈이다. 늦었지만 이참에 두 영화도 볼 생각.

 

박찬욱에 대한 내 불호의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집착적/도착적으로 보이는 박 감독식 '폭력'을 내 정서가 받아들이길 거부했기 때문이다. '폭력의 미학'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되겠다 싶을 만큼 박 감독의 영화 속 '폭력'은 집요할 만큼 동일한 서사를 반복하는데, 다시 말하지만 내용이 아니라 그것을 발산하는 그의 방식이 문제였다. 그러니까 나한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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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함께 온 스틸컷 5종 엽서.

 

책이라면 환장하지만 각본은 그닥 취향이 아니어서 <헤어질 결심>은 내가 구입한 첫 번째 각본집인데,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거의 스탕달 신드롬에 준하는 충격이 몰려왔다. 뭔가 가슴이 웅장해졌달까... 

정서경 작가와 박찬욱 감독의 후기 코멘터리 유툽을 봤는데 (요약하면 대충)'해준의 후일담을 넣을까도 생각했으나 결국 뺀 이유는 우리가 하고 싶은 얘기는 인간이 아니라 자연의 얘기이기 때문'이라던 정 작가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각본 결말부에서 가슴이 웅장해지는 기분을 느꼈던 것도 결국 같은 맥락에서 비롯된 이유였을 거다. 인간의 얘기였다면 아마 잠시 슬프고 잠시 우울하고 그리고 끝이었겠지.

 

B와 극장에서 볼 참이었는데 상영관이 턱도 없이 적은 탓에 둘의 스케줄을 맞추지 못해 결국 포기한 게 내내 아쉽다. 내가 혼밥은 잘 하는데 혼자 영화 감상은 못하는 인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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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장면이라도 각본을 읽기 전과 읽은 후의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책을 읽기 전엔 관람 못한 영화의 한 장면에 불과했지만 책을 읽은 후엔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표정이 가슴 시리게 눈에 박힌다.

 

해준 씨, 그거 사랑 맞아요.

그게 사랑이 아니면 세상에 사랑은 없어요. 

 

 

 

서래

우리 일을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해준

우리 일, 무슨 일이요?

 

해준

내가 당신 집 앞에서 밤마다 서성인 일이요?

당신 숨소리를 들으면서 깊이 잠든 일이요?

당신을 끌어안고 행복하다고 속삭인 일이요?

내가 품위 있댔죠? 품위가 어디서 나오는 줄 알아요?

자부심이에요. 난 자부심 있는 경찰이었어요. 그런데 여자에 미쳐서……

 

 

 

해준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해준/서래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서래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발췌하면서 후반부를 다시 읽는데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은 없지만 더 먹먹하고 더 슬펐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비극은 대개 '솔직하지 못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돌이킬 수 없다는 데서 그 비극은 더 없이 치명적이고.


 

 

 

후일담...

 

책을 구매할 당시 나는,

 

1. 박찬욱 감독 불호

2. 영화 안 봤음

3. 각본 예약 구매함

 

이었는데 이쯤되니 물음표가 백만 개쯤 생긴다. 보다시피 1,2와 3의 간극이 너무 크다. 영화를 보고 감동 받아 책을 구입한 것도 아니고, 영화를 안 봤는데 불호 감독의 신작 각본집을 그것도 예약구매로 샀다고?

생각할수록 이해가 안 가는 전개에 뒤늦게 이게 뭐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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