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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舌)
- 네 언어의 한계는 곧 네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by Ludwig Wittgenstein
10371 bytes / 조회: 497 / 2022.12.19 22:19
Hallo... stranger.


평생을 흔들어놓는 영화가 있다. 카페에 앉아 뭔가 정리해보려 하지만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고 가슴이 텅 비어 자그마한 진동에도 천둥이 치듯 쿵쾅거릴 것이다. 그런 영화들이 있다. 그런 영화들은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흘러야 비교적 선명한 사실관계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사실과 기분이 적당히 분리되고 나면 준비가 된 것이다. 그때 그 영화에 관한 글을 쓸 수가 있다.

 

-p.128, 『나의 친애하는 적』

 

 

허지웅의 두 번째 에세이 『나의 친애하는 적』을 읽던 중 '하루를 흔들어놓는 영화가 있다'에 이르렀을 때, 생각을 해봤다. 

 

나한텐 어떤 영화가 그랬더라...

 

멘탈이 솜사탕 수준으로 보들보들한 나는 영화와 소설을 보면서 종종 멘탈의 뿌리를 흔드는 위협을 받곤 한다. '인간의 이야기'에 워낙 섬약하여 영화든 소설이든 보기 전에 엔딩이 해피한가 새드한가 먼저 확인하는 버릇은 유년 때 이미 정립됐는데 이런 방어적인 태도는 아마 앞으로도 계속 그럴 거다.

 

그런 의미에서 '평생을 흔들어놓은' 것 중에 최고는 (아직까지는)단연 아다치 미츠루의 『H2』다.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가 종방했을 때 커뮤니티의 반응이 참 대단했는데, 해당 드라마를 보지 않았음에도 충격과 배신감을 토로하던 수많은 목소리를 내가 십분 이해할 수 있었던 건 『H2』 엔딩을 봤을 때 내 심정이 그랬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떠오른 건 Patrick Marber의 동명 희곡을 영화화한 『CLOSER』. *'헤어질 결심'(박찬욱)은 이미 충분히 얘기했으므로 생략하고...

 

하고 많은 영화와 소설 중 하필 이 작품이 떠오른 건 아마 최근 전성기을 맞은 '불륜' 컨텐츠에 거듭 노출된 여파도 있을 거고, 최근에 <헤어질 결심> 게시물을 쓰면서 이 책을 언급했던 영향도 있는 것 같지만 각설하고, 『CLOSER』는 영화도 희곡도 다 재미있는데 흥미로운 건 영화에서 인상적인 장면과 희곡에서 인상적인 장면이 다르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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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떠올리니 계속 머리 속에 맴돌며 독서를 방해해서 결국 벌떡 일어나 책장에서 꺼내온 『CLOSER』

 

영화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장면은 래리(클라이브 오언)과 댄(주드 로) 사이에서 방황하던 안나(줄리아 로버츠)가 결국 래리에게 돌아간 후 래리의 진료실로 찾아온 댄에게 래리가 '안나한테 들었는데 잠자리에서 너는 이렇다며? 저렇다며?' 어쩌고저쩌고 댄의 잠자리 사정을 조롱할 때였다. 반면 희곡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댄이 앨리스(나탈리 포트먼)에게 자신의 부정을 고백할 때였다. 여기서 '충격'은 허지웅이 말한 '하루 혹은 평생을 흔들어놓는'... 즉, 잊을만 하면 뇌가 그 장면을 소환해선 걔는 걔한테 왜 그랬을까? 왜? 왜? 곱씹게 하는 결정적 장면을 의미한다.

 

밤 늦게 귀가한 댄은 앨리스에게 일하고 왔다고 거짓말하지만 이내 안나와 있었다고 털어놓는다.

(이하, 원작 희곡에서 지문은 생략하고 대사를 중심으로 인용함)

 

Dan This will hurt. I've been with Anna. I'm in love with her. We've been seeing each other for a year.

 

silence

 

Alice  I'm going

Dan  I'm sorry

Ailce Irrelevant. What are you sorry for?

Dan  Everything.

Alice  Why didn't you tell me before?

Dan  Cowardice. 

Alice  Is it because she's clever?

Dan  No, it's because... she doesn't need me.

 

댄이 앨리스에게 불륜을 고백하는 장면은 뉴욕 출장을 다녀온 래리가 안나에게 매춘부와 잤다고 털어놓는 장면과 교차하면서 등장하는데(pp.45-61), 불륜 고백 배틀이 벌어지는 난장판에서 피해자는 오직 앨리스 뿐이다. 

매춘부에게 욕구를 풀었다던 래리는 안나가 '나도 댄과 잤다'고 털어놓자 안나에게 댄과 어떤 섹스를 했는지 폭력적으로 대답을 종용하고, 댄은 앨리스가 상처를 받을 줄 알면서도 오직 자신의 양심적 떳떳함을 위해 앨리스의 질문에 곧이곧대로 '사실'을 털어놓는다. 안나를 사랑해. 안나와 잤어. 1년 됐어. 집에도 데리고 왔어. 네가 지금 앉아 있는 소파에서도 했어. 

이쯤되면 '양아치새끼'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다정하고 상냥한 앨리스는 결국 조용히 폭발한다.

 

At least have the guts to look at me.
 

 

참고로 앨리스와 댄은 사실혼에 준하는 동거, 안나와 래리는 결혼 1년 차인 상황.

 

영화를 본 직후 원작을 찾다가 국내에 번역이 안 된 걸 알고 의아했는데 의문은 원서를 읽으면서 해소됐다. 특히 래리와 안나의 대사가, 뉘앙스의 맛을 제대로 살려서 번역하려면 좀 난감할 것도 같다. 하지만 필립 로스의 『포트노이의 불평』도 번역되어 나오는 시절인데 『CLOSER』도 어느날 툭 번역되어 등장할지도 모르겠다. 인기 없는 장르- 희곡이라 그 시기를 장담할 수는 없겠지만.


영화 <클로저>의 대표적인 장면으로 대개 OST와 함께 등장하는 오프닝을 꼽는데, 도로에서 쓰러진 앨리스가 그녀를 부축하는 댄에게 "hello stranger" 인사하는 클로즈업이 희곡에선 댄의 대사를 통해 간접처리된다. 그리고 정작 "hello stranger"가 직접적인 장면으로 등장하는 건 안나와 래리가 대화를 나눌 때다. 

 

 

Dan  You were lying on the ground, you focused on me, you said, 'Hallo, stranger.'

Alice What a slut.

(p.4)

 

 

Larry  Hallo...Stranger.

Anna  Hallo.

Larry  Intense conversation?

(p.44)

 

 

누가 가장 나쁜가.

찌질한 댄?

우유부단한 안나?

자기중심적인 래리? 

 

분명한 건 이 무대에서 승자는 앨리스라는 거다. 비록 앨리스는 좀 많이 외롭고, 우울하고, 슬프겠지만 아마 곧 회복할 거다. 앨리스는 숭고한 죽음을 추모할 줄 아는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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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메모_

 

제목 '나의 친애하는 적'의 출처에 대해 허지웅은 따로 밝히지 않는다. 의도적인 건지, 비도의도적인 건지, 혹은 다른 어디에서 이미 언급이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책 한 권에 오롯이 드러나는 그의 영화 취향을 봤을 때 헤어조크의 영화에서 제목을 가지고 왔을 거란 호기심은 이제 (거의)확신에 온점을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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