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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6817 bytes / 조회: 4,391 / ????.08.28 21:31
[도서] 김별아 / 가미가제 독고다이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던 채플린의 명언은 한 시대를 점령했던 희극인이 남길 수 있는 최고의 말이 아닌가 싶다. 덧붙이면 인생의 페이소스를 모르면 절대로 할 수 없을 것 같은 이 말의 미덕은 '살아 있는 동안은 어떤 인생도 희망적'이라는 낙관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김별아의 신작『가미가제 독고다이』는 마지막까지 유쾌하고 희망적인 그래서 결국 재미있는 소설이다.

제목에서 이미 공표하듯『가미가제 독고다이』의 배경은 일제강점기인데, 그 자체로 민족의 비극인 이 시대도 어쨌든 사람 사는 세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격동의 세상 한 복판에 있는 인물이 하윤식이다. 사실 윤식은 일제강점기가 배경인 소설의 주인공에게 으레 기대하게 마련인 '영웅적' 요소를 요리조리 잘도 피해가는 문제적 인물이다. 그러니까 친일 행위로 벌어들인 아버지의 재산을 자신의 쾌락을 채우는데 쓰기에도 급급한 얄팍한 인물이 바로 하윤식인 것. 그러나 이런 윤식이 못마땅하긴 해도 미운 감정은 안 드는 이유는 본문 pp.339-343에 잘 드러나 있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을 이 소설의 절창(絶唱)으로 꼽고 싶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여자를 좋아하는 건 집안 내력이다.'(p.9)는 비극적인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의 첫 문장으로는 어딘지 생뚱맞다. 하지만 삶, 사람, 사랑은 결국 같은 의미라고 하지 않는가. 그리하여 3代에 걸쳐 호락호락하지 않은 여자를 좋아하게 되어 버린 남자들의 순정은 때로 시대에 편승하고, 때로 시대를 역행하며 꿋꿋하게 '역사의 귀퉁이'를 차지한다. 물론 이건 개인의 비극이지 역사의 비극은 아니다. 그러니 소설『가미가제 독고다이』는 어찌 보면 비극적 시대를 희극적으로 살아내는 개인의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화자인 하윤식을 통해 '유서 깊은' 백정 집안의 내력을 거쳐 태평양을 향해 '가미가제(神風의 독음)'가 몰아치던 해방 직전까지 쭉 이어지는 걸쭉한 입담에 빠져들다 보면 말 그대로 한 편의 희극을 본 듯한 기분이 드는데, 사실 소설의 중심이 되는 '하 씨 일가'의 내력 자체가 희극이다. 돈으로 백정 신분을 세탁하고 번듯한 족보를 사들인 아버지, 출신이 의심스러운 남편의 돈으로 '홈 스위트 홈'을 연출하는데 혈안이 된 어머니, 그리고 어딜 보나 모범생인 경식과 어딜 봐도 문제아인 윤식 형제까지.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이 희극적으로 읽힐 수 있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소설의 화자인 하윤식의 덕이다.
같은 얘기도 어떤 사람이 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얘기가 되듯, 하필 작가가 비극적 인물이랄 수 있는 경식이 아닌 희극적 인물인 윤식을 화자로 삼은 것은 이 소설을 읽는 방점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를 가늠하게 한다.
실제로 책을 읽으면서, 읽고 나서 든 생각은 만약 윤식이 아니라 경식이 화자였다면 이 소설은 전혀 다른 감성, 다른 방향으로 읽혔겠구나, 였다. 기실 경식과 윤식 두 형제의 대비되는 삶을 쫓아가다 보면 삶의 비극과 희극을 가르는 것은 삶을 흔드는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을 다루는 인물의 속성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보편적인 기준으로 외모, 지성, 인품 어느 면을 보아도 윤식이 열성인자라면 경식은 우성인자다. 윤식이 '모던 가족'의 틈을 비집고 일찌감치 환락의 세계에 빠져들었다면, 경식은 그 시대 이 땅의 청년이라면 가져야 마땅할 애국심의 발현으로 독립 운동- 좀 더 분명하게는 '주의(ism)'에 빠져 드는 차이만큼이나 두 사람의 희/비극성은 뚜렷한 차이를 드러낸다. 그에 더해 '카인과 아벨'의 인용에 이르면 이 소설의 희극성과 비극성이 적절하게 균형을 잘 이루는 것에 감탄하게 된다.
하여간에 하윤식은 참으로 개성이 뚜렷하고 입체적인 인물이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서 책 표지를 다시 살폈다. 태양인지 달인지에 걸터앉아 우주를 올려다 보는 제복을 입은 청년이 보인다. 아, 네가 하윤식구나? 어쩐지 친근한 기분이 든다.

맛있는 과자와 맛없는 과자가 있을 때, 물론 개인차가 있겠으나 내 경우 맛없는 과자를 먼저 먹는다. 그러니까 좋아하는 것일수록 뒤로 남겨 아끼는 습성이 있는데 이러한 습성은 소설을 읽을 때도 여지없이 적용된다. 그에 더해 소설이 재미있을수록, 내 취향일수록 아끼고 아껴서 천천히 읽는 버릇이 있는데 좋아하는 사람과는 더 오래 같이 있고 싶고, 빨리 헤어지고 싶지 않은 기분이 이런 걸까 싶기도 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오랜만에 제대로 취향인 재미있는 소설 한 권을 읽었다. 사실 내가 이 작가의 소설을 이렇게나 재미있게 읽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말하자면 전작주의인데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이 나오면 '아무 것도 따지지 않고 묻지도 않고' 일단 무조건 책장에 꽂아두어야 직성이 풀린다. 문제는 김별아는 그 대척점에 있는 작가였다는 사실. 몇 번 시도했다가 결국 완독에 실패한『미실』의 작가이니, 내가 이 작가의 소설과는 연이 없겠구나 생각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래서 그녀의 신작 소설이 내 손에 들어왔을 때, 다른 의미에서 소설을 읽기까지 꽤나 미적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책을 펼쳤을 때, 첫 장 이후로 내 입에서 가장 자주 나온 말은 "우아, 재밌다!" 였다.
그리하여 맛난 음식을 배불리 먹은 포만감을 느끼면서 책장에 책을 꽂으며 든 생각은 그간 취향이 아니라고 밀쳐버렸던 작가와 작가의 소설을 다시 살펴봐야겠다는 반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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