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디로 책 본문의 문장을 빌려, '듀나의 상상력엔 내가 의미를 읽을 수 있는 세계관 따위는 없어'(p.341,「디북」) 라고나 할까.
배경이 미래이고, 첨단 과학에 사이버, 돌연변이, 유전공학 등등 관련 용어만 늘어놓으면 SF인가?
관련 장르가 활성화되고 이미 오래전에 정점에 오른 서양 SF로부터 빌려온 듀나의 SF 상상력은 새로운 세계로 확장은커녕 작가의 독자적인 세계관 구축에 실패하여 매트릭스 키드에 머물고 만 느낌. 당연히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고.
열세 개의 단편은 읽는 내내 남의 꿈 얘기를 듣는 것마냥 지루하고 따분하고,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건가' 시간 낭비일 뿐이라는 회의와 씨름하게 한다. (그나마「여우골」은 읽을만 했다.)
하긴 책 말미에 '꿈보다 해석'인 모평론가의 작품해설도 있다. 단언컨데 이 단편집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뛰어난 SF는 바로 '해설'이다. 사족 하나 더. SF인데 굳이 등장인물이 서양인이어야 할 필요가 있는지 진심으로 궁금하다. 외계인 우주선은 미국 상공에만 나타난다더니 SF문학 너마저도...orz
나아가 브루스 윌리스 주연 영화 <써로게이트>의 상상력을 떠올리게 하는「디북」은 등장인물들이 온통 서양인인 건 물론이고 에너지 혹은 신경망(계)인 화자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인간적(humanity)이어서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진화와 변이를 통해 출몰한 전혀 새로운 유형의 종족도 예외없이 지나치게 인간적인데 이는 아마도 듀나에게 인류라는 '종(種)' 개념이 '인간'을 벗어나지 못해 그런 것이 아닐까, 그런 근거 없는 추측을 해봤다.
그(녀)가 쓴 영화평을 읽었다. 이 정도의 글쓰기로 누리는 문화권력으로 과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