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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6652 bytes / 조회: 3,699 / ????.09.03 23:24
[도서] 장석주 『이상과 모던뽀이들』


이상 탄생 100주년(2010) 기념으로 기획되었다는 이 책은, 본문 마지막에 내용 출처 문헌을 밝히는데 할애한 페이지만도 14p에 달한다. 저자 후기를 참고하면 내가 집에서 편하게 뒹굴면서 읽은 한 권의 책은 말하자면 100권의 책, 1년이라는 시간이 집약된 결과물인 셈.
 
1930년 대의 이상과 그를 둘러싼 신지식인 모던보이들을 조명하는 이 책은 읽는 동안 두 가지가 인상적인데 1930년 대의 경성과 이상을 비롯한 구인회에서 활동했던 작가들의 일대기가 그것이다.
그중에서도 모던 도시 경성에 경쟁하듯 우후죽순 들어선 신식 백화점(하물며 승강기도 있다!) 이야기는 그 시절에 관한 지식이 거의 없는 내겐 무척이나 신선했다. 거기다 백화점을 중심으로 부녀자, 여대생들이 욕구를 푸는 민간 소비 행태가 지금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다양한 자료는 근대를 식민지 국가로 전락한 민족의 암흑기로만 인식했던, 한 시절에 대한 내 무지를 일깨우는 일종의 컬쳐쇼크였다.

 

백화점 옥상 정원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피카소·스트라빈스키·장 콕토의 작품에 열을 올리고, '파리에 가서 삼 년간 공부하고 오자'(김기림-이상) 계획을 세우기도 하며, 친구의 연인을 짝사랑해 자살 소동을 벌이기도 하는 모던보이들은 '그 시절도 사람 사는 시절'이었다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새삼 일깨운다. 본문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 중에 '박제'가 있는데 어쩌면 나야말로 30년대 혹은 근대 경성을 박제해서 내 인식 안에 담아두었던 것 같다. 한 장의 흑백 사진, 소리가 거세된 흑백 영상으로만 박제하고 정작 그 시절이 현재와 미래로 이어지는 오늘의 과거였음을 잊고 있었던 것인데, 이런 사실을 인식하고 나니 본문에 실린 흑백 사진들이 예전과 다른 감성으로 다가온다. 예전엔 기록 사진 정도로만 느꼈다면 지금은 애틋하고 짠한 감정의 찌꺼기가 남는 차이랄까.

 

구인회를 중심으로 하는 작가들의 이야기도 흥미로운데 그중 김기림이 조선일보 입사 때 본 공채시험 내용이 기억에 남는다. 상식 시험에 출제된 문제가 데몬스트레슌·조광조·불복종운동·모라토리엄·코즈모폴리턴·아관파천·스탈린 등이었다고 하니, 예나 지금이나 지식산업의 종사자는 똑똑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데몬스트레슌은 아마도 demonstration인 듯.

한편 신지식인 모던보이들의 독서량도 흥미롭다. 한 예로『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천변풍경』의 박태원은 학생 때 제임스 조이스·고리키·투르게네프·톨스토이·빅토르 위고·모파상·하이네 등에 심취했다고 하는데 왠지 문청의 모범적인 정석 같달까. 얼마 전 조이스의『더블린 사람들』을 읽으면서 서술 구조가 박태원의 작풍과 비슷하다고 느꼈는데 역시 영향을 받았던 모양이다.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 그 작가가 읽어온 독서 저변과 독서량이 보이는데 최근 몇 년간 현대문학을 하는 몇몇 작가군의 소설을 읽으면서 종종 어이없음을 느끼는 부분이 바로 이거다. 빈약한 서사와 얄팍한 서술구조, 유행에 편승한 국적 불명의 장르 은유는 자신들이야 pop하다고 주장하고 싶은지 모르겠으나 역설적으로 그들 내부의 문학 환경이 얼마나 조악한지 드러낸다.

 

1930년대는 들여다 볼수록 참 재미있는 시대다.
민족수탈, 독립운동, 친일 등 온갖 암울한 요소들이 뒤섞여 판치던 한쪽에선 모던 껄, 모던 뽀이들의 자유연애, 정사(情死)가 공존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본문에 바우만의 '액체 근대'라는 개념이 잠깐 등장하는데, 말하자면 1900-1930년대 경성이야말로 '액체 근대'에 부합하는 시절이었다고...
저자는 이에 덧붙여, 1895년에 단발령이 공포되었을 때 '내 목을 벨지언정 머리카락은 못 자른다'고 완강하게 저항하던 사회 분위기가 불과 30여년만에 나팔바지, 금팔목시계, 백구두, 봉두난발 등의 '洋'식을 선망하는 시대로 급변이 가능한 배경은 문화의 파급력이 고체가 아닌 액체의 성질을 띠고 있기 때문(본문 2부 1장) 이라고 해석한다.

 

고백하건데 '이상'은 내 이해의 범주를 넘어서는 문인이다.
이상의 사생활도, 이상의 작품도 내 정서로는 교감할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럼에도 그가 근대 이전에도 근대 이후에도 찾아볼 수 없는 전무후무한 문제적 작가라는 생각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그가 일간지에 연재하던 연작시「오감도」는 원래 30회까지 준비했으나 독자들의 반발로 15회로 마감했다고 한다.
한 작가의 문학세계가 보편적이지 않다 해서 기어이 그의 붓을 꺾으려 들었던 독자들의 몰이해가 안타까운 한편 지금도 난해하다는 평을 듣는 그의 작품이고 보면 당시로서는 오죽했을까 이해도 가는 부분.

 

짧은 생마저도 그의 작품 세계의 연장처럼 느껴지는 이상.
작가이자 시인이며 화가이고 건축기사였던 김해경 혹은 이상인 그는 천재일까 기재일까.
책을 읽고 나니 천재로 생각이 기운다. 무엇보다 한글과 일어, 숫자와 도안이 섞인 육필 원고는 그가 장난으로, 허세로, 가볍게 문학을 한 것은 아니겠거니 하는 작가로서의 진정성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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