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종성에 의한, 표종성을 위한 <베를린> > Review

류승완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니 그가 연출한 영화의 80% 정도를 본 것 같다. 이런 확률을 근거로 나름 류승완 감독의 스타일에 익숙하다고 자부하는 입장에서, 류 감독의 장기는 좁은 장소에서 펼쳐지는 인파이터 액션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거라고 지금껏 단정적으로 생각했던 탓에 <베를린> 소식을 들었을 때 조금 의외였다. 그리고 영화를 본 소감은 '아, 이 감독은 광장으로 나와서도 잘 찍는구나'

영화에서 의외로 거슬렸던 건 한석규의 외국어 연기였는데(류승범도 거슬렸지만 한석규한테 밀렸다), 필모에 어울리지 않는 연극적이고 과장된 연기가 혹시 의도된 건가 싶기도 하고... 뭐 진실은 저 너머에...

<베를린>에서 가장 빛나는 건 뭐니뭐니 해도 '표종성'이다.
인간이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왔을 때 우유부단해지는 이유는 가진 게 많아서다. 이것도 가져야겠고, 저것도 챙겨야겠고. 하지만 가진 게 없는 사람은 선택을 하는 순간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 

표종성에게 중요한 것, 지켜야 할 것은 국가와 인민이라는 대의 하나다. 그건 그의 행동을 결정 짓는 바로미터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표종성은 개인이 아니라 그 자체로 '북'과 '북의 이념'을 의미한다. 쉽게 말하면 당에 죽고 사는 충성으로 똘똘 뭉친 강성이라는 얘기. 여기까지 이해하면 영화에서 'Die hard' 하는 표종성의 심리와 행동이 명징해진다. 표종성이 자신의 수제자인 동명수에게 총을 겨눈 건 동명수가 개인 이익 때문에 당을 속였기 때문이고, 표종성이 련정희를 지키려고 한 건 련정희가 당을 배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사랑도 있었을지 모르나 영화는 거기까진 친절하게 보여주지 않으므로 그건 관객이 상상으로 메꿔야 한다. 그런데 이 매력적인 캐릭터가 갑자기 붕괴한다. 비록 동명수에게 잡힌 련정희를 구하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표종성은 정진수(한석규)에게 허탈할 정도로 쉽게 '전향하갔소' 한다. 그 순간 그때까지의 긴장감과 재미가 확 반감된 건 두 말할 것도 없다. 다행히 표종성이 다시 표종성다워졌을 때 영화도 다시 재미있어진다. 불행하게도 그 직후 엔딩크레딧이 올라왔지만 대신 원래의 직설적이고 즉물적인 인물로 회복된 표종성을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속편을 기대하는 설렘을 갖게 한다.

플롯이 진행되는 중간 중간 얘기가 생략됐나 싶게 개연성이 어색한 부분도 있지만 어차피 <베를린>이 지향하는 건 액션영화이므로 눈에 잘 안 띄는 이런 자잘한 얘기는 중요하지 않다.

*포스터 이미지 출처: 네이버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