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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79 bytes / 조회: 4,896 / ????.05.19 20:53
[도서]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by 레이먼드 챈들러


단 몇 줄로 요약된 한 인물의 연대기를 읽는 기분은 늘 묘한 감상을 남기는데 이는 결국 인간은 자연의 일부분임을 확인하는, 자연순응에서 오는 체념 때문인 듯 하다.

인간의 평균수명을 생각하면 1888년 출생, 1959년 사망은 축복받은 긴 생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억울할 것도 없는 나름 선방한 긴 생이다. 또 작가의 입을 빌리면 불혹을 넘겨 탐정소설로 데뷔해 소설작가로, 시나리오작가로 부와 명성을 얻고 자신이 활동하던 장르에 자신의 이름을 딴 '스타일'도 남겼으니 작가로서도 꽤 만족할만한 삶이다. 무엇보다 30년 넘게 친구로 동반자로 사랑하고 의지한 아내가 있었으니 그만하면 남자로서도 제법 축복 받은 삶이지 않는가. 요약하면 레이먼드 챈들러는 누구의 부러움을 사도 당당한, 이만하면 꽤 괜찮은 삶을 살았던 남자다.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는, 비교하자면 스티븐 킹의『유혹하는 글쓰기』와는 성격이 전혀 다른 에세이다. 킹의 에세이는 제목 그대로 '글쓰기'에 대한 작가의 노하우를 담은 책이지만 챈들러의 에세이는 지인들과 주고 받은 작가의 편지를 통해 '작가로서의 일상'을 토로하는 책이다.

순전한 챈들러의 육성을 통해 챈들러에 대해 한 자락을 발견하는 재미가 의외로 쏠쏠하다. 책, 보다 정확한 의미로 '챈들러의 편지'를 읽으면서 순간 순간 피식 웃는 지점이 있는데 이를 테면 자신의 작품을 칭찬하는 A에게도, 비판하는 B에게도 챈들러는 공평하게 불퉁하다. 그때문인지 전반적인 작가의 인상은 작가로서의 자존심이 강하고 까칠한 느낌이다. 이는 사실 직업인으로서의 작가에겐 장점이 더 많은 성격이지만 아마 챈들러가 이 글을 본다면 '네가 뭘 모르나 본데(블라블라)' 불만을 토해낼 것 같다.

「필립 말로」제목이 붙은 4장은 작가가 설명하는 필립 말로가 등장한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작가의 페르소나라고 해도 무방할 필립 말로에게서 작가의 자화상을 더듬게 된다. 물론 실제로도 일부는 그런 부분도 있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장르문학, 구체적으로 '탐정소설'에 대한 세간의 비평에 특히 목소리가 올라가고 말 끝이 한층 더 날카로워지는 챈들러는 천생 작가다. 그것도 뛰어난 하드보일드 탐정소설 작가다.

장르소설(구체적으로 탐정소설)을 하위문화로 분류하는 평론에 거세게 반발하는 챈들러의 모습은 호모폴리티쿠스로서의 본성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당연하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정치성을 가지게 마련이고 작가도 예외는 아니기 때문. 문화예술이 다 그렇지만 특히 문학은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를 투영해서 이해하려는 습성이 있는데, 그 연장선에서 최근 궁금한 것은 이런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소설에서 추구하고 실현하는 정의를 현실에서도 추구하는가, 라는 부분.
실제 챈들러가 가지고 있는 사회정의는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챈들러는 필립 말로에 대해, 어느 누가 경제적 이득 없이 위험에 자신을 던져 정의를 실현하려고 들겠는가, 라고 말로를 지지한다. 탐정소설이 남자들에게 특히 인기를 끄는 건 역시 주인공을 통해 남자들의 로망을 실현하는 대리만족의 의미가 크지 않을까.

역자의 역주에 오랜만에 만족하면서 읽었다. 역자와 편집자의 작가에 대한 애정이 전반에서 느껴지는 한 권이었다.


덧1> 책의 만듦새에 대해 얘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책이 정말 예쁘다. 겉표지를 벗기고 속지를 보는 순간 "아, 예쁘다" 소리가 절로 나온다.
덧2> 말라르메의 고양이와 챈들러의 고양이가 만나는 상상을 해봤다. 아마도 제 인간주인보다 시니컬하고 삐딱한 대화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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