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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13865 bytes / 조회: 4,970 / ????.07.24 16:27
[도서] 로베르트 무질『생도 되를레스의 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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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는 완전히 혼자였다



퇴를레스는 뭔가를 말하려고 했고, 애써 진한 농담을 해보고 싶었다. 그는 이럴 때 아무 말이나 그냥 하기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고 느꼈다. 하지만 그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는 굳어 있는 미소로 자기 위에 있는 거친 얼굴을, 그리고 뜻 모를 두 눈을 응시했다. 그때 바깥 세계는 작아지기 시작했고… 점점 더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한순간 돌멩이를 집어 들었던 그 농촌 총각의 모습이 떠올랐고, 그가 자기를 조롱하는 듯했다. 그러다가 그는 완전히 혼자였다. -p.41

 

 

 

허수(虛數)


  

"얘, 너 아까 그것 다 이해했니?"
"뭘?"
"그 허수 이야기 말이야?"
"아, 그건 전혀 어렵지 않아. -1의 제곱근이 계산의 단위라는 것만 확실히 해두면 돼."
"하지만 바로 그거야. 그런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거든. 그것이 양수든 음수든 간에 모든 숫자는 제곱했을 때 양수가 되지. 그래서 음수의 제곱근이 될 만한 실제의 수는 전혀 존재할 수가 없는 거야."
"아주 옳은 말이야. 하지만 제곱근 계산을 음수에 응용해본다고 해서 안 될 이유는 없잖아? 물론 그때 거기서 실제의 수가 나올 수는 없어. 그래서 그 결과를 허수라고 부르는 것이잖아. 그건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아. 여기에 보통 항상 누군가가 앉아 있었어. 그래서 우린 오늘도 그에게 의자를 놓아주지. 그런데 그가 그 사이에 만약 죽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마치 그가 올 것처럼 하거든."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수학적으로 분명히,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렇게 해. 그게 마치 그렇지 않다는 듯 말이야. 아마 뭔가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성과가 있겠지. 결국 무리수에 있어서도 다를 바가 없잖아? 네가 아무리 오래 계산하더라도 끝에 도달할 수 없는 그런 나눗셈, 그 값이 절대 나올 수 없는 그런 나눗셈 말이야. 그리고 평행선들이 무한 속에서 서로 교차한다는 말을 들으면 넌 무슨 생각을 하니? 내 생각으론, 우리가 너무 꼼꼼히 따진다면 수학은 존재할 수 없을 거야." -pp.88-91

 

 

 

그는 침묵했다



퇴를레스의 연령을 훨씬 벗어나는 이러한 말들과 비유가 엄청난 흥분 속에서, 거의 시적 영감의 순간에 쉽고 자연스럽게 그의 입술 위에 올려졌다. 이제 그는 목소리를 낮추고, 마치 자신의 고통에 사라잡힌 듯, 덧붙였다.

"…이제 그것은 지나갔습니다. 저는, 그래도 제가 착각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아무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저는 알고 있어요. 사물들은 사물들이고 아마 언제나 그렇게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들을 때로는 이렇게, 때로는 저렇게 바라볼 것입니다. 때로는 오성의 눈으로, 때로는 다른 눈으로… 그리고 저는 더 이상 그것을 서로 비교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침묵했다. 그는 이제 가도 좋다는 것을 아주 당연하게 여겼고, 그 누구도 그를 막지 않았다. -p.174

 

 

지난주던가, '신의 증명'과 관련하여 글 하나를 읽었는데 '허수(虛數)' 개념을 인용한 내용이 신선했다. 보이지 않는 신을 믿는 건 수학 문제를 풀 때 '허수'를 등장시키는 것과 같다... 는, 대충 그런 내용인데 도서관의 요정인지 마침 직후에 집어든『생도 퇴를레스의 혼란』에 이 '허수'가 등장한다. 재미있기도 하고 묘하기도 하고.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 작가의 배경이 소설 이해와 직결되는 경우가 간혹 있는데 대표적으로 마르께스가 그렇다. 남미대륙에 뿌려진 피의 역사를 모르고서 읽는다면 그의 소설을 반도 못 읽은 것이다. 내용은 조금 다르지만『생도 퇴를레스의 혼란』의 작가 로베르트 무질도 작가의 배경을 아는 것이 소설 이해에 도움이 된다. 오스트리아 출생, 1880 - 1940 생몰인 작가의 연표는 소설을 읽기 전엔 의미가 없으나 소설을 읽고 나면 자연스럽게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를 의식하게 되는데,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자주 떠올린 건 바로 '말할 수 없는 것에 침묵하라'였기 때문. 

 

어린 퇴를레스('young Torless')에게 닥친 혼란의 기저는 결국 '본질'이라는 개념이다. 퇴를레스는 어느날 예고 없이 기성사회(부모, 사회, 교육...)로부터 물려받은 통념이 의심 받고 나아가 붕괴될 위기에 직면한다. 계기는 동료 생도가 절도를 들키면서다.

동료 생도들의 돈을 훔쳐오던 바시니는 퇴를레스 무리 중 한 명인 라이팅에게 절도를 들키는데, 학교 당국에 사실을 알리고 바시니를 퇴학시켜야 한다는 퇴를레스와 달리 라이팅과 바이네베르크는 바시니의 절도를 공론화하는 대신 바시니에게 그들이 직접 개인적인 징벌을 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두 사람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으나 그렇다고 자신의 주장에 확신도 없는 퇴를레스가 태도를 결정 짓지 못하는 사이 나머지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바시니에게 징벌을 주는데 이를 목격한 퇴를레스는 '가해자를 가해하는' 그들의 방식에 거부감을 느끼고 이는 죄와 벌이라는 근원을 향한 환멸로 이어진다.

 

자신이 느끼는 환멸의 정체조차 확신할 수 없어 더욱 혼란했던 퇴를레스는 해결책으로 자연과학의 '허수', 철학자 칸트로 위안을 삼고자 하나 이는 일시적인 것일 뿐 혼란은 오히려 미궁이다.

잠깐이나마 퇴를레스에게 혼란을 정리할 열쇠로 등장했던 칸트의 저서는 소설에서는 드러나지 않으나 앞뒤 맥락으로 보아 아마 <윤리학 정초>가 아닐까 짐작된다. 이 짐작이 맞다는 가정 하에, 칸트의 윤리학에서 특기할 것은 '덕(or 선)이란 정언적이어야 한다'는 덕의 조건인데, 정언(定言)적이라는 건 조건이나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예로, 칸트에 의하면 하얀거짓말도 거짓말인 것. 과연 이런 엄격하고 청교도적인 정의가 퇴를레스의 혼란을 잠재울 수 있을까? 답은 '아니다'. 먼훗날 언젠가 퇴를레스에게 뒤통수를 치는 깨달음을 줄지언정 어쨌든 현재의 퇴를레스에겐 그조차도 또다른 혼란일 뿐이다.

 

'오성'(Understanding, 悟性, Verstand)은 소설 전반에 걸쳐 퇴를레스의 대사와 독백을 통해 빈번하게 등장하는 개념인데, 흄의 <오성에 관하여>에 빗대자면 결국 판단의 대상은 '도덕'이며, 판단의 주체를 경험으로 삼을 것인가, 본성으로 삼을 것인가의 문제로 귀착된다. 흄 식으로 말하면 logos인가, pathos인가쯤 되겠다.

 

퇴를레스는 지금은 알 수 없으니 '침묵하겠다'로 일단은 자신의 혼란에 종지부를 찍는(것으로 보인)다. 해답은 없다. 해답으로 가는 과정은 온통 혼란뿐이다. 마치 구도자의 숙명처럼 진리는 없으며, 진리로 가는 길은 험난할 뿐인 것처럼.

 

:: 지만지의 '고전천줄' 기획을 이해 못 하는 건 나뿐인가? 그렇다고 문고판답게(편집 차원) 가격이 싼 것도 아니지 않은가. 지만지 고전천줄은 처음인데, 읽으면서 내내 요약본을 읽는 찜찜함이 따라다녔다. 아마도 고전천줄은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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