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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21429 bytes / 조회: 4,522 / ????.11.17 22:24
[도서] J.D.샐린저『프래니와 주이』


소설을 읽고 '미치고 환장'하는 기분을 느낀 게 얼마만이더라 꼽아보니 최근엔 소설을 거의 안 읽었구나.

거의 종장까지 읽었을 무렵, 너무 좋아서 책을 안고 방방 뛰다가 결국 M에게 전화했다.

목소리에서 흥분이 전해졌는지 웬일로 M이 두서없이 마구 쏟아지는 내 말을 군소리 없이 들어주었는데 그와중에 나는 낭독까지 했다. 다음은 M에게 낭독했던 대목.

 

* 굵은 글씨는 원문 표기 그대로. 원문에서는 이탤릭체로 강조했다고 한다.

 

(…)빌어먹을, 화제를 바꾸자. 네가 비판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은 다르지. 그 터퍼 교수라는 사람. 또 어젯밤에 네가 얘기한 멍청이 둘, 맨리어스와 다른 한 명도. 나는 그런 사람들을 수십 명은 봤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마찬가지일 거야. 그리고 그들이 무해하지 않다는 것에도 동의해. 사실 지옥처럼 치명적이지. 전능하셔서 만지는 모든 것을 순전히 학문적인 것으로, 쓸모없는 것으로 바꾸어버리지. 아니면 더 나쁘게, 신흥종교 같은 것으로 만들거나. 내 생각에 그들이 비난받아야 하는 이유는 특히 무지한 미련퉁이 떨거지들에게 학위를 주고 졸업시켜 해마다 6월이면 전국 곳곳으로 풀어 보내고 있기 때문이야." 여기서 여전히 천장을 쳐다보고 있던 주이는, 얼굴을 찡그림과 동시에 머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지 않는 건, 시모어나 버디 둘 다 좋아하지 않았을 것 같은 건, 네가 이들에 대해 말하는 방식이야. 너는 그들이 대변하는 것을 경멸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 자체를 경멸하지. 그래서는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가 되고 말아, 프래니, 정말이야. 예를 들면 이 터퍼라는 사람 얘기를 할 때면 진짜로 네 눈에 작은 살의가 번득여. 강의실에 들어오기 전 화장실에 가서 머리를 헝클어뜨린다는 둥, 그런 모든 것들. 그가 그럴지도 모르지. 네가 그에 대해 얘기해준 다른 모든 것과 잘 맞아떨어지니까. 안 맞는다는 얘기가 아니야. 하지만 그가 자기 머리에 무슨 짓을 하든 그건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친구. 그의 개인적인 가식이 좀 웃기다고 생각하는 건, 뭐 그래, 네 자유야. 자존감이 부족해서 스스로 한심한 매력거리 하나 만들려고 애쓰는 꼴이 딱하다고 여겨도 좋고. 하지만 네가 그 얘기를 할 때, 나 지금 없는 소리 하는 거 아냐, 너는 마치 그의 머리카락이 너의 개인적인 숙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했어. 그건 옳지 않아. 너도 그건 알고 있어. 네가 이 제도라는 것과 맞서 전쟁을 벌이고 싶다면 그냥 차갑고 지적인 여자로서 총을 쏘라고. 적이 거기 있기 때문이지 네가 그의 머리 스타일이나 망할 넥타이가 맘에 들지 않아서 그러는 게 아니잖아."-pp.204-205

 

『프래니와 주이』는 중단편「프래니」와「주이」연작 소설로 등장인물은 프래니, 주이, 글래스 부인(엄마), 레인(프래니의 남자친구) 넷이고 이들 외에도 편지와 극중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등장하는 버디(둘째 형), 시모어(첫째 형)가 있다.

 

『호밀밭의 파수꾼』처럼『프래니와 주이』도 '기-기-기-결'의 지루한 구성인데, 중반이 지나도록 그들이 대립하는 내용이 공감도 안 가고 이해도 안 되니 이야기 속으로 진입하는 게 쉽지 않다.

일단 이 소설은 종교적 담론을 빼놓고는 얘기할 수가 없는데, 샐린저의 개인 성향인지 청교도적 교조주의는『호밀밭의 파수꾼』에 이어 이번 소설에서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종교는 그 생리 자체가 폐쇄성과 결벽증을 갖고 있다 보니 '예수기도문'이 실린 작은 책을 둘러싼 글래스 남매의 다툼에 가까운 대화 역시 공감보다는 먼나라 먼이웃처럼 '아이고 의미없다'는 생각만 자꾸 든다.

 

재미있는 점은 종교에 대한 샐린저의 이중적인 태도인데, 매맞는 아내랄까, 그러니까 청교도주의 세태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결국 구원은 청교도주의 안에서 찾는다는 샐린저식 해법이 일견 '종교가 다 해줄거예요~'하는 허탈감을 준다.

 

게다가 이 소설은 샐린저의 다른 소설에 비해 인물들의 대화나 행동이 부자연스럽고 작위적인 인상이 강한데 이는 프래니와 주이가 '배우'인 이력과 무관하지 않다. 전업주부인 글래스 부인(베시 글래스) 역시 젊은 날엔 배우였으니 이 집안의 내력이 그러하다. 이렇듯 등장인물 모두가 한결같이 연극적 대사, 연극적 제스쳐를 취하니 좋은 말로도 소설의 흡인력이 좋다고 하기는 어렵다. 한마디로 소설에서 감각적인 재미를 느끼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

 

일본판『프래니와 주이』의 역자인 하루키는 역자 서문에서 소설 속 종교적 담론을 일종의 정신적 메타포로 수용하면 '종교'라는 허울에 현혹되지 않고 내용의 핵심에 접근하는데 보다 쉬울 것이라고 했지만, 이게 사실 간단치가 않다. 이 연작 소설이 발표된 1954년, 1957년은 아이젠하워(2차 세계대전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했던 사령관) 집권기이고, 10년 째 접어드는 전후 냉전체제가 공고히 다져지고 있고, 매카시즘 광풍이 한바탕 휘몰아쳤던 직후이다. 이런 세태와 청교도라는 배경을 깔고 뉴욕 부유층 남매가 종교적 담론을 벌이는 것이다. 문화의 뿌리가 아예 다른 국가의 독자들은 1950년대 뉴욕의 세태와 더불어 종교적인 장벽도 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장벽들에도 불구하고 나를 그토록 흥분케 했던, 작가로서 샐린저의 명성이 여지 없이 빛나는 지점이 있다. 이 낯설고 까다로운 대화를 끝까지 듣다 보면 기대하지 않았던 순간에, 기대하지 않았던 보편적 감동과 맞닥뜨리는 순간이 온다. 소설이 대개 그렇지만 마지막까지 읽어야지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에 도달할 수 있는데, 같은 길을 이어 붙이기 한 것 같은 산길을 오르고 오르고 또 오르다 보면 어느새 정상이고 저 아래로 걸어온 길이 완성된 풍경을 이루는 장광을 보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고진감래(苦盡甘來)!

 

그리하여 지극히 '보편적인 독자'인 나는「주이」마지막 페이지를 읽은 직후 책을 가슴에 끌어안고 잔뜩 흥분해서 온 집안을 돌아다녔다.

소설 거의 막바지에 소나기처럼 등장한 '뚱뚱한 여자'는 의미 그대로 이 소설의 화룡점정이고 절창이다. 주이에게 구두를 닦게 하고, 프래니에게 무대를 재미있게 만들도록 감시하고 조종하는 시모어의 '뚱뚱한 여자'가 주이가 이해한 것처럼 정말 '그리스도'인지는 알 수 없으나(사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독자(=나)로 하여금 소설 전체를 되돌아보게 하고 다양한 해석과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구원의 메타포임에는 분명하다.

 

(샐린저를 대변하는 것 같은)샐린저의 소설 속 '오빠'에게 여동생은 특별하다.『프래니와 주이』에서 내가 감동 받았던 장면은 두 곳인데 모두 주이가 프래니에게 내면적 소통을 시도하던 장면이다. 근거는 없지만 나는 그 장면에서 왠지 홀든이 피비로 인해 구원받았던 빚을, 주이가 프래니에게 갚는 것처럼 느꼈고 괜히 울컥했다.

 

소설을 읽으면서 영혼 없는 은유 만큼이나 의인법을 좋아하지 않는 내 취향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

 

거실 나머지 부분에는 그리도 무례하게 굴던 태양이 훌륭하게 처신하고 있었다. (…) 햇살은 사실 아프간 담요 전체를 씻고 있었고, 연푸른색 울 담요에 노니는 따스하고 화사한 빛의 유희는 그것 자체만으로도 바라볼 가치가 있었다. -p.158

 

 

다음은 샐린저의 예술론 혹은 작가론을 엿볼 수 있는 대목.

 

예술가의 유일한 관심은 어떤 완벽함을 달성하는 것이고,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의 완벽함이야. 너는 다른 것들에 대해선 생각할 권리가 없어. 어떠한 의미에서든. -p.250

 

분량이 짧은「프래니」편은 그냥 저냥 읽고「주이」편을 읽던 도중, 결국 거미줄보다 얇은 인내심을 탓하며 책 후면을 뒤졌다. 도대체 작가가, 소설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 옮긴이든 작가든 그들의 생각을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소설 엔딩 뒤로 페이지가 공백인 것을 확인하는 순간 뒤늦게 샐린저의 소설은 작가 에이전시의 요구로 서문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 떠올랐다.그리하여 내친 김에 일본어판 역자인 하루키의 해설이 궁금해 잉여력을 발휘, 하루키 역자 서문을 잠깐 훑어봤다. 하루키 역자 서문은 삽지 형태로 책에 끼웠다고 한다.

 

- 아래는『프래니와 주이』일본어판 하루키 역자 서문(혹은 역자 해설)을 읽고 짧은 감상

 

 

『フラニーとズーイ』
J.D.サリンジャㅡ 村上春樹・訳

アメリカ東部の名門大学に通うグラス家の美しい末娘フラニーと俳優で五歳年上の兄ズーイ。物語は登場人物たちの都会的な会話に溢れ、深い隠喩に満ちている。エゴだらけの世界に欺瞞を覚え、小さな宗教書に魂の救済を求めるフラニー。ズーイは才気とユーモアに富む渾身の言葉で自分の殻に閉じこもる妹を救い出す。ナイーヴで優しい魂を持ったサリンジャー文学の傑作。──村上春樹による新訳!

新潮文庫 ISBN:978-4-10-205704-9 発売日:2014/03/01 680円(定価)

 

 * 출처:http://www.shinchosha.co.jp/fz/fz_murakami.html

 

 

일단 하루키는 이 소설의 재미는 단연 '매력적인 문체'에 있다고 단언하는데, '버디 문체'라는 표현이 흥미롭다.「주이」는 주이에게 보낸 버디의 편지로 시작하는데 서간문의 특성상 화자의 개성이 직접적으로 드러나고 그로 인해 친밀감이 더 느껴지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굳이 '버디 문체'라고 특정 짓기에는 '홀든 문체'와 그 차이가 썩 안 느껴진다는 게 문제다. 한발 더 나아가 하루키는 샐린저가 버디의 문체를 차용해 '주이'를 쓰고 있으며 문장이 자유자재로 변화한다고 감탄하는데 역시 공감이 안 간다.「주이」는 서사가 아니라 종교적 담론을 바탕으로 대화에서 시작해 대화로 끝나는 소설이기 때문. 뒤에 하루키가 언급하는 문법적인 요소를 얘기하는 것이라면 하루키 개인의(혹은 일본인 정서의) 취향이라고 이해할 수는 있겠다. * 참고로 내가 읽은 '호밀밭'과 '주이'는 역자가 다르다.

 

공감이 가는 부분은, 책을 읽은 사람은 대개 공감하겠지만,「프래니」가「주이」의 도입부로 읽힌다는 부분과 샐린저가 레인을 통해 학벌주의 엘리트를 비판한다는 부분인데, 사실 학벌주의 엘리트 의식을 비판하는 부분은『호밀밭의 파수꾼』에서 이미 한차례 등장했기 때문에 딱히 새롭지는 않다.

하루키 역자 서문을 읽다 웃음이 터졌던 부분은 독자들이 제기했다는 '프래니 임신설'이다. 너무 자주 실신하고, 섭식을 거부하는 게 이유라는데 뭔가 설득력이 있는, 굉장히 합리적인 의심이지 않은가. 하물며 비평가들마저 이 의문에 가담했다고 하니 자기 소설에 강박에 가까운 결벽증을 가진 샐린저가 기함하고 펄쩍 뛸만 하다.

 

「주이」는 애초에 두 가지 이유로 뉴요커지(紙)로 부터 거절 당했는데 '분량'과 너무 '종교적'이라 게 그 이유였다고 한다. 그러나 고래로 위기에 닥친 작가 옆엔 능력있는 편집자가 있는 법. 뉴요커지 편집장의 결단력과 팬심으로 소설은 분량은 좀 줄었으나 무사히 뉴요커 지면에 실리고 샐린저는 작가의 명성을 더욱 공고히 한다. 하루키 역자 서문에도 언급하지만 국내『프래니와 주이』역시 책 서두에서 샐린저가 아들과 더불어 편집장에게 감사의 말을 남기는 헌사를 볼 수 있다. 샐린저의 은둔 성향을 미루어 당시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국내판 역자도 일러두기에 Zooey의 발음 표기를 놓고 판본을 가진 에이전시에 연락해 'zooee'라고 발음을 확인했다는 설명을 했는데, 이는 일본도 상황이 비슷했던 모양이다. 일본의 경우 기존엔 'ゾ-イ-'(조이)가 일반적이었으나 'ズ-イ', 'ゾ-イ'등을 놓고 숙고 끝에 'ズ-イ'를 선택했다고 한다. * 'ズ'의 원어민 발음은 주와 즈의 중간 어드메쯤...

 

하루키 역자 서문을 읽으면서 부러웠던 부분은 샐린저 사후 작가와 관련하여 다양한 책이 출간되고 있다는 내용. 작가가 알면 무덤에서 뛰쳐나올 일이지만 독자는 그저 반가운 일.

거의 홀짝 수준으로 역자 서문을 대충 훑은 소감은 그 발로가 하루키의 팬심인지 아니면 역자로서의 성실성, 책임감인지는 모르겠으나 주례사 비평의 느낌이 드는 대목도 적지 않다는 거. 하지만 나름대로 재미있고 유익했다. 무엇보다 역자 서문만으로도 이런 감상을 쓰게 하는 하루키의 힘이랄까.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나는 하루키를 안 좋아한다.

 

하루키 역자 서문을 읽은 직후 국내 출판사 제공 책소개(=출판사 리뷰)를 읽는데 이미 읽은 듯한 기시감에 대조해 보니 하루키 서문과 출판사 리뷰 중 일부는 거의 번역 수준으로 흡사하다.

1950년대 미국, 동양철학, 원시그리스도교리, 비트세대, 반물줄질주의와 반실용주의를 지향하는 종교성, 아카데미즘, 샐린저의 트라우마 등등...

참고로 하루키 역자서문이 실린 일본판은 2014년 3월에 출간됐다.

아래는 각각 문학동네의 출판사 리뷰와 하루키 역자 서문 중 일부를 비교한 것. 

 

 

1950년대 미국에서는 동양철학과 원시 그리스도교 교리가 지금보다 훨씬 절박하고 리얼한 존재성을 띠었고, 비트세대로 이어지는 하나의 사상적 조류였다. 이러한 종교성은 반물질주의와 반실용주의를 지향하며 압도적 번영을 반성 없이 향유하던 미국 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차갑고 경직된 아카데미즘이나 상상력이 모자란 획일적 미디어에 대한 반대였다. 이는 또한 제2차세계대전에 병사로 종군하며 격전지를 헤쳐온 샐린저가 짊어지게 된 깊은 트라우마의 절실한 위안 수단이며 인간성을 회복해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원동력이기도 했다. 샐린저가 말하고자 했던 영성은 특정 종교의 고정된 교의가 아니라 오히려 유동적이고 일반적인 ‘신을 원하는 심성’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출처. 온라인 서점 출판사 리뷰 中)

 

 

ただひとつご理解いただきたいのは、一九五〇年代のアメリカにおいては、東洋哲学や原始キリスト教の教義は、おそらく現在よりもずっと切迫した、リアルな存在性を持っていたという事実だ。ビート・ジェネレーションへと繋がっていくひとつの思想的ファッションとなっていた、と言ってしまってもいいかもしれない(もちろんサリンジャーの場合はそれは単なるファッションに留まらず、良くも悪くも彼を全的に包含していったわけだが)。それらの宗教性が意味するのは反物質主義であり、反プラグマティズムであり、圧倒的繁栄を無反省に享受するアメリカ社会への静かなる「ノー」であった。冷たく硬直したアカデミズムや、想像力を欠いた画一的メディアに対する「ノー」でもあった。また同時にそれは、第二次大戦に兵士として従軍し、数々の激戦の中をくぐり抜けてきたサリンジャーが背負うことになった深いトラウマの、切実な癒やしの手段であり、ヒューマニティー回復への大事な道筋でもあった。 (출처. http://www.shinchosha.co.jp/fz/fz_murakami.html

 

 

 

 

 

 

 

 

『목수들아, 대들보를 높이 올려라』『아홉 가지 이야기』『프래니와 주이』는 글래스 집안의 일곱 아이들의 연작 소설.

이중『목수들아, 대들보를 높이 올려라』에는 글래스 가족의 대화와 회상을 통해서 등장하던 첫째 시모어, 무려 살아있는 시모어와 그 유명한 '바나나 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이 있다.

절판되었던『프래니와 주이』는 줄곧 보관함에 있었는데 오랜만에 샐리저의 책을 꺼내『프래니와 주이』와 함께 줄세우니 감회가 새롭다. 비록 저 초록초록한 한 권은 도서관에 반납했지만 조만간 채워야겠다. 일곱 아이들이 함께 있기를 바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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