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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6789 bytes / 조회: 4,782 / ????.01.21 05:00
[도서] 체홉 『갈매기』


MBC 예능프로인 '라디오스타'를 흉내내어, 누가 내게 ' 체홉의 희곡「갈매기」란?' 묻는다면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수면제'라고 말하겠다. 첫 페이지를 읽다 졸았고, 두 번째 페이지 반 정도를 읽었을 때 또 졸았고, 서너 페이지를 간신히 넘겼을 땐 아예 푹 잠들었으니, 러시아 출신의 사실주의의 대가라는 이 작가의 희곡은 적어도 내겐 아주 훌륭한 수면제가 맞다.

불행하게도 이런 현상은 총 4막 중 3막을 읽을 때까지 계속 됐다. 독서 도중에 M에게 하소연했더니 형식의 문제라고 진단을 내렸다. 하지만 나는 이건 형식이 아니라 내용의 문제라고 투덜거렸다. 그리고 완독의 산을 오르고 난 지금은, 역시 형식의 문제인가 한다.

첫 장의 짤막한 인물 소개 뒤 인물의 대사만 이어지는 체홉의 희곡은 읽는 이를 위한 것이 아닌 연기를 하는 이를 위한 것이고, 그러니 서사와 서술에 익숙한 나는 툭하면 너는 누구? 헤맸고 따라서 인물의 감정선에 쉽게 집중하지 못했다. 참고로 나는 희곡을 곧잘 읽고, 심지어 어떤 작품은 좋아하기까지 한다. * 예. 베르히트, 카뮈.

뭐, 하여튼, 독후감이라는 걸 처음 쓰기 시작할 때 줄거리 요약하는 것부터 배운 습관대로 줄거리를 써보면 이러하다.

 

잘 나가는 작가와 역시 잘 나가는 여배우는 연인이다. 여배우에겐 작가지망생인 아들이 있다.

잘 나가는 여배우의 남동생의 전원 주택에 모여든 사람들은 모두 엇갈린 연정을 품고 있다.

가난한 교사는 삼촌의 장원을 돌보는 고용인의 딸을 연모하고,

고용인의 딸은 작가지망생인 아들을 연모하고,

작가지망생 아들은 배우 지망생인 아가씨를 연모하고,

배우 지망생인 아가씨는 잘 나가는 작가를 연모한다.

 

결국 전원 주택을 떠나는 날, 잘 나가는 작가는 배우 지망생 아가씨와 사랑을 확인한다.

그리고 2년 후.

 

고용인의 딸은 교사와 결혼했지만 여전히 (이젠 유명 작가가 된) 여배우의 아들을 연모하고 있고,

여배우의 아들은 제법 잘 나가는 작가가 됐지만 여전히 무명 여배우가 된 아가씨를 연모하고 있고,

무명 여배우가 된 아가씨는 잘 나가는 작가와 짧은 동거 끝에 파경을 맞고 시골 극단을 떠돌지만 여전히 잘 나가는 작가를 사랑하고 있다.

 

줄거리를 정리하고 나니, 이 작품이 얼핏 짝사랑 연가인가 싶기도 하지만 등장인물들의 엇갈린 구도에 은유나 상징 같은 해석을 곁들이면 이 단순해보이는 줄거리가 한층 다층적인 성질을 띤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짝사랑을 앓는 이들 중, 상대에게 감정을 표현하고 다가서는 과정이 가장 과감하고 적극적인 인물은 배우 지망생인 아가씨다. 하지만 마냥 순수하게 보이는 아가씨의 사랑을 한꺼풀 벗기면 그 이면에 숨은 진짜 욕망은 잘 나가는 작가의 연인인 동시에 잘 나가는 여배우라는 설정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작가의 작품에 반했다던 어린 아가씨는 작가에게 버림 받고, 심리적 경제적으로 비참한 나락으로 떨어지지만 작가를 향한 사랑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

한편 작가지망생인 아들에게 작가는 도달하고 싶은 욕망의 목적지이자, 연모하는 여인이 마음을 준 연적이자, 어머니의 애정을 받는 상대이다.

 

 

메드베덴코 당신은 왜 항상 검은옷을 입나요?

마샤         이건 제 인생의 상복이에요. 전 불행하거든요.

 

- 체홉『갈매기』

 

이 글의 작성 일자는 2012.09.03 13:26

2012년. 어쩐지 수긍이 갈 것도 같고. 워낙 그 해가 개인적으로 블랙홀 같은 시기였던지라.

 

내용을 보니, 결론을 맺지 못한 느낌인데, 어쩔까 하다 이 글은 원글 그대로 그냥 두고, 나중에 '갈매기'를 다시 읽고, 그때 글을 완성하던지 하는 걸로.

그때그때 떠오르는 단상이나, 게시판용 글을 작성하다가 바쁘거나 기타등등 도중에 딴 짓을 해야할 때 홈 어느 구석에 글을 임시 저장해두곤 하는데 이 글 체홉의 갈매기도 그런 식으로 임시 저장하곤 아마 까먹었던 모양.

메모를 찾을 게 있어 홈 어느 구석을 뒤지다가 우연찮게 이 게시물을 발견했다. 내가 평소 정신을 좀 빼놓고 다니기는 하지만 그와중에도 자타공인 인정하는 건 내 집에 있는 책과 내가 쓴 글은 정확하게 기억한다는 것이다.

체홉 '갈매기'를 읽는 순간 어, 나 이거 casket에 쓴 기억이 없는데, ???, 하면서 검색으로 뒤져보니 역시나 글이 없고, 대신 본문에도 있는 M에게 하소연하는 내용이 짤막하게 있다. 아마 9일에 이 글을 쓰고, M에게 투덜대고, 책을 마저 읽고 15일에 글을 끄적였겠거니 짐작한다.

http://www.nancholic.com/bbs/board.php?bo_table=nc_blabla&wr_id=605&page=6

 

* 결국 찾던 메모는 못 찾았다는 엔딩.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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