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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14244 bytes / 조회: 3,863 / ????.04.10 08:31
[도서] 낸시 크레스 『허공에서 춤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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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열여섯 편의 중단편이 수록되었다.

특이하게도 매 작품이 끝날 때마다 작가 후기가 있다. 결과적으로 작가 후기는 작가의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 매우 유의미한 배려가 되었다. 비록 '자연인' 작가에 대한 환상은 한없이 투명에 가까워졌을지라도.

목록 중 좋았다기보다 읽으면서 인상이 남았던 몇 편만 감상을 간추려본다. 

 

「스페인의 거지들」

 

목차 중 첫번째는 네뷸러상과 휴고상을 동시에 받은「스페인의 거지들」이다.

미래 지구의 유전공학은 태아의 유전자 성형에 성공하고 그 결과로 인간의 3대 기본욕구 중 하나인 수면욕구를 통제하는 데까지 이른다. 그러나 실험 초기에 임상실험의 축복을 받고 태어나 배경이 제각각인 열 아홉 명의 아이들을 제외하면 이후 유전공학의 축복은 기득권자의 전유물이 된다. 리샤 역시 지구촌의 돈 많은 자본가 아버지 캠든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無수면 유전자 성형을 받고 태어났다. 하지만 캠든의 완벽한 계획에도 차질이 생겼으니 바로 유전자 성형을 받지 않은 아이, 즉 리샤의 쌍둥이가 함께 수정된 것이다. 그 아이가 바로 앨리스다.

 

소설에서 無수면은 시간을 지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같은 조건에서 無수면자의 시계 바늘은 수면자의 시계 바늘보다 더 많이 돈다.

제목의 의미는 스페인 여행 중인 여행자에게 거지가 1달러를 요구했는데 여행자가 주지 않자 거지가 여행자에게 악의를 품고 공격성을 가진다는 내용으로 無수면인인 타미와 리샤의 논쟁 중에 등장한다. 달러를 주는 것은 여행자의 호의이며 선의이고, 호의를 베풀 것인가 말 것인가는 여행자의 선택이지 의무가 아니다. 그럼에도 달러를 얻지 못한 거지는 여행자를 미워하고 적대한다. 타미는 '스페인의 거지'를 비유로 들어 유전자 성형으로 영재 혹은 천재의 재능 혜택을 받고 태어난 無수면인을 수면인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경고하고, 리샤는 그것은 일부이며 無수면인의 특별함이 수면인의 삶을 윤택하게 할 것이고 결국 모두가 평화롭게 공존할 것이라고 반박한다.

 

타미와 리샤의 논쟁은 평범한 지구인이 돌연변이 엑스맨과 과연 공존하려고 할 것인가 논쟁하던 찰스와 마그네토를 연상시킨다. 언제나처럼 정답은 없다. 다만 현실을 빌어 살짝 유추해볼 수는 있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유전자 성형을 받은 無수면인이나 엑스맨에는 못 미치지만 수억 지구인 중에는 실제로 월등한 능력을 자랑하는 소수의 인간들이 존재하고, 그들은 그들만의 작은 세계를 구축하고 그 작은 세계로 나머지 평범한 지구인들이 살고 있는 큰 세계를 지배하며 잘 살고 있다.

 

맥거핀이랄지. 유전자 성형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이방인처럼 불쑥 수정란에 끼어든 리샤의 쌍둥이 동생 앨리스의 비중은 의외로 크지 않다. 오히려 평범한 인간 앨리스는 소설 속에서 내내 존재감 없이 이따금 등장할 뿐이다. 아마 그래서 소설 후반부에 등장한 앨리스가 더욱 특별했을 것이다.

 

리샤는 캠든에게 말했다. 아빠가 틀렸어요. 앨리스는 특별해요. 아, 아빠, 앨리스의 특별함이란! 아빠가 틀렸어요. -p.147

 

오직 분명한 진실은, 평범은 비범이 침범할 수 없는 고유의 영역을 가지고 있다는 거다. 평범은 비범의 부분집합이 아니라 여집합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 간단한 사실을 잊는다.

 

 

「오늘을 허하라」

  

그가 갑자기 한쪽 손을 휙 뻗는다.

"이봐요, 모르시겠어요? 저는 이곳을 사랑해요. 모두 다 말이에요. 흠이 있어도, 제가 망쳐버렸어도, 설령 제가 경기에서 지더라도 말이에요. 전 이곳을 사랑해요."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제 보였다. 그는 사랑했다. 이곳을. (…중략)

나는 한번도 직접 예술가가 되고 싶었던 적이 없다.

더 이상 별로 할 말이 없었다. 신은 작업을 다시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은 가끔 현실보다 예술적인 위험이라는 관념을 더 사랑한다. 허나 그는 이미 한 번 했었다. 전부 다, 최종적인 예술적 희생까지 도달했었다. 그것이 그를 변화시켰다. (…중략)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울퉁불퉁한 정서적인 톤의 한가운데에서 그 부분은 특히 돋보였었다. 이번에도 그렇게 한다면 그의 참가작의 심상 패턴은 틀림없이 강화되리라. -p.400

 

여기에 등장하는 '신'은, 발췌한 문장에선 '그'로 등장하지만, 우리 모두가 아는 그 '신'이 맞다. '신'의 정체성을 이해하면 위 문장의 '최종적인 예술적 희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단편은 지나치게 은유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러한 '느낌'에 대한 정답은 고맙게도 작가 후기에 작가 스스로가 밝히고 있다.

 

모든 작가들은 적나라함과 난해함 사이의 균형을 잡기 위해 씨름한다. 전형적인 행동, 상투적인 인물, 노골적인 설명으로 주제를 대놓고 명확하게 제시하면 독자들은 "지나친데, 말이 너무 많지 않아?"라고 말한다. 말하려는 바를 교묘하고 간접적으로, 오직 상징과 암시를 통해서만 살짝 담으면 독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어?"

「오늘을 허하라」에서 나는 균형을 잃었다. 이 글을 잡지에서 읽은 독자 누구도 내가 하려던 말을 이해하지 못했으니 내 작업은 실패였다. 나와 대화한 누구도 그 소설의 주제를 파악하지 못했다. 결국 나는 이 단편을 이 책에 싣기 위해 고쳐 썼다. 누군가는 이해해줄지도 모른다는 끝없이 고개를 드는 소망을 담아, 마지막 몇 문단을 새로 썼다. -p.402

 

대체로 에고가 강한 작가들의 성향을 감안하면 매우 솔직한 진단이다. 알고 있음에도 인정 안 하는 작가들이 태반이라는 면에서 낸시 크레스는 적어도 정직하기는 하다. 다만 스스로 '균형을 잃었다'고 인정하면서도 끝끝내 상징과 암시를 포기하지 못하는 고집...이랄지, 미련이랄지.

새로 고쳐 썼다는 마지막 문단은 이 소설을 아직 읽지 않은, 앞으로 읽을 독자를 위해 옳기지 않겠다. 개인적으로는 굳이? 싶다. 무엇보다 과녁을 가린 천을 벗겨봤자 반전의 묘미는 둘째 치고 김빠진 사이다처럼 흥미고 뭐고 시시하다. 그럼에도 나처럼 궁굼해할 성격 급한 미래독자를 위해...

 

모든 예술 작품에는 그 나름의 내적인 속도가 있다. 이곳의 천 년은 다르게 흐른다. 가시관을 들고 묵직한 나무 십자가를 진 채 지평선에서 다가오는 그들의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를 찾아오는 소리를. -p.401

 

독자의 지적인 이해는 작가의 어려운 문장을 위한 보험이 아니다. 내가 지적으로 쓰면 독자도 지적으로 읽겠지- 라는 생각은 작가의 희망사항일 뿐. 하물며 소설이 그닥 지적이지도 않다.

 

 

「올리트 감옥의 꽃」

 

전반적으로 '유물론'의 느낌을 묘하게 많이 받았던 단편. 이를테면 이런 대목.

 

"기억이오? 기억은 '작동'하지 않아요. 단지 그냥 있을 뿐이에요."

"아니,기억은 기억을 형성하는 단-백질에 의해 작동합니다."

그가 테란 단어를 사용했다가 고쳐 말한다.

"작은 음식 조각."

말이 안 된다. 음식과 기억이 무슨 상관이람? 기억을 먹거나 음식을 먹어서 기억을 얻을 수는 없다. (…하략) -p.429

 

* 유물론(출처. 두산백과)

정신을 바로 물질이라고 주장하는 입장 또는 물질(뇌)의 상태·속성·기능이라고 주장하는 입장 등 여러 입장이 있다.

 

유물론적 사고를 하는 테란인과 달리 월드인인 화자는 모든 사물의 개념을 관념을 거쳐 형상화한다. 하물며 인간과 죽음조차도 예외가 아니다.

 

"아무도 혼자 남겨지지 않게 서로를 아낍니다. 혼자 있는 것은 나빠요. 혼자 행동하는 것도 나쁘죠. 사람은 함께 있을 때에야 존재하니까요."

"당연하죠"

혹시 이 사람 정말 바보 아닐까?

"현실은 언제나 공유돼요. 오직 한 사람만 별빛을 본다면 그 별이 정말로 존재하는 걸까요?"

그는 웃음을 짓고는 내가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무어라 말한다. 그러고는 다시 진짜 말로 되풀이한다.

"나무가 넘어질 때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하면 소리가 있을까요?"-p.426

 

역시 유물론적 인식이 드러나는 대화인데 이 문단을 읽던 중에 반가운 문장과 마주쳤다. 바로 마지막 대목, 볼드처리한 부분인데 '나무가 넘어질 때…'를 내가 최초로 읽은 건 글렌 예페스의『우리는 매트릭스 안에 살고 있나』에서다. 내가 본 것만 벌써 두 번째 인용인 걸 보면 제법 유명한 문장인가 본데 이사하면서 책 정리를 미루었더니 이 책이 어디에 묻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책을 찾아 이 문장의 출처가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데 아쉽다.

뭐 어쨌든. 사막이 실재하는지 안 하는지는 오로지 사막만이 알 일이다.

 

이 밖에도,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딸들에게」는 SF 장르 중에서도 대체역사에 속하는 단편인데 장르의 특징인 '원전 비틀기'의 신선도가 약하고 이야기도 심심하다. 사실 낸시 크레스의 단편집을 읽은 전반적인 감상은 책을 펼치기 전에 가졌던 기대에 많이 못미쳤다.

이 단편집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유전공학' 혹은 '생명공학'이 공통 소재로 등장한다는 건데 유전적 특질(=DNA)에 직접 손을 대는 맞춤형 유전자 성형이나, 신체의 일부를 최적화 시키는 바이오계량 무용수라던가 소재 자체는 신선했으나 정작 이러한 소재의 활용이 소설적 재미로는 미치지 못했다. 알아듣지 못할 난해한 공학 용어를 늘어놓으며 음모와 맞서는 해커 주연의 영화를 보는 기분이랄까.「스페인의 거지들」「경계들」과 단편집의 제목이기도 한「허공에서 춤추다」를 읽은 소감으로는 이 작가는 생명공학의 음모론보다는 오히려 SF를 가미한 하드보일드에 재능이 있어 보인다.

 

나는 SF장르 덕후이고, 그래서 네뷸러와 휴고 수상작이라면 조금 과장해서 아묻따 환장하는데 상의 권위가 곧 명성의 보증이 되는 건 아니라는 냉정한 현실을 새삼 깨닫는다. SF장르 조차도 옛작가들을 그리워하게 되니 왠지 서글픈 심정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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