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웃으면 만고에 봄이요 <패왕별희> >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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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9010 bytes / 조회: 3,284 / ????.03.19 02:17
[영상] 한번 웃으면 만고에 봄이요 <패왕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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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으로 웹서핑을 하던 중에 우연히 팝업창에서 <패왕별희> 공연 소식을 접하고 오랜만에 옛 영화의 감상을 곱씹었다. 시간이 오래 지났고 당연히 세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래도 <패왕별희>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여전히 머리 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경극단에서 우희를 연기하는 두지(장국영)와 패왕 항우를 연기하는 시투(장풍의). 그리고 홍등가에서 제일 잘 나가는 창기 주샨(공리).

 

어려서부터 패왕과 우희를 연기하며 함께 자란 시투와 두지는 자연스럽게 역할에 동화되고 성인이 됐을 무렵에는 이미 원래 자신의 정체성과 배역의 정체성의 경계가 희미하다. 특히 어느덧 패왕 시투에게 연정을 갖게 된 두지는 시투의 연인이며 훗날 아내가 되는 주샨을 질투하고 미워하고, 주샨은 그런 두지를 비웃지만 내심은 패왕의 우희인 두지의 존재가 껄끄럽다.

 

 

앞서 언급했던 인상적인 장면은 절정으로 치닫는 부분에서 등장한다.

중일전쟁의 잔재가 정리되고 간신히 일상으로 돌아오는가 했으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문화혁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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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앞에서 공연을 했던 시투와 두지는 본보기로 광장으로 끌려나온다.

평생 애정만 받아왔던 대중 앞에 내동댕이쳐진 시투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두지를 향해 손가락을 뻗는다. 

시투에 의해 광장에서 비참한 과거가 발가벗겨진 두지는 그 분노를 진실을 아는 주샨에게 쏟아내고, 그에 주샨이 주목을 받자 주샨의 출신이 제게 해가 될까 지레 겁먹은 시투는 이번엔 단 한번도 그녀를 사랑한 적이 없노라, 주샨을 부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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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투가 두려움과 공포에 질려 몸부림 칠 때, 그런 시투로 인해 시투를 사랑하는 두지와 주샨이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을 때.

그 소란하고 시끄러운 난리북새통에서 시투의 입으로 존재를 부정당한 두지와 주샨이 서로의 얼굴을 응시하던 상처받은 눈빛이 잊혀지지가 않는다. 이 순간의 둘은 남자도 여자도 아닌, 그저 사랑하는 연인에게 버림 받은 사람이다. 

 

극 속에서 두지가 항의한다. "왜 항상 우희만 죽어야 되는 거지?"

두지는 아마도 그 이유를 알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죽는 건, 우희... 두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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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분장을 하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유독 감독이 공들여 찍은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小楼:小尼姑年方二八!

[시투: 열여섯에 비구니가 되었다!]


蝶衣:正青春被师父削去了头发!

[두지: 꽃다운 시절, 사부에게 머리를 깎였다!]


小楼: 我本是男儿郎,

[시투: 난 본래 남자이고,]


蝶衣: 又不是女娇娥!

[두지: 여자도 아닌데!]


小楼: 错了!又错了!

[시투: 틀렸네, 또 틀렸어!]


蝶衣:...我本是男儿郎,又不是女娇娥. 来,我们再来.

[두지: ...난 본래 남자인데, 여자도 아닌데. (미소) 자, 다시해보자.]

 

 

시투의 사랑을 받았던 주샨은 강했고, 시투의 사랑을 받지 못한 두지는 나약했다. 

그런 줄 알았다. 시투가 패왕일 때는.


 

개봉 후 장국영은 중국의 어느 대학 강좌에서 극중 두지의 자살에 관하여 세 가지로 분석했다고 한다.

그중 하나는 평생을 우희로, 스타로 살았던 두지가 대중 앞에서 자신이 늙어가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거라는 것이었다.

이 육성이 우희 장국영이 아닌 배우 장국영의 목소리로 들린다면 지나치게 결과론적인 해석일까.

 

영화는 그날로부터 11년이 흐른 후 패왕과 우희로 분한 두 사람이 낡은 체육관에서 만나 공연을 하는 장면에서 끝이 난다. 관객이 아무도 없는 체육관은 나이 들고 쇠락한 두 사람의 처지와 닮았다.

 

 

一笑万古春,一啼万古愁

한번 웃으면 만고에 웃음이요, 한번 훌쩍이면 만고에 근심이라

 

<패왕별희>

 
 

 

세상만사 마음에 달려있다고 한들 그 마음 먹기가 참으로 어렵다. 형태도 없는 고작 마음일 뿐인데 그게 그리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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