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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14636 bytes / 조회: 3,537 / 2019.10.18 18:48
[도서] 최은영『내게 무해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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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의 소설집 두 권을 연이어 읽으면서 계속 생각했다.

 

작가의 집에 우물이 하나 있다. 우물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건 우울이다. 

작가는 작은 조롱박으로 우물에서 퍼올린 우울로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고, 동네 사람들에게 먹인다.

그럴 때 작가는 웃고 있을까, 찡그리고 있을까, 울고 있을까.

 

또 생각한다.

 

행복한 얘기, 즐거운 얘기, 유쾌한 얘기를 쓰지 못하는 건 작가의 천성인가, 습관인가, 불운인가.

 

『쇼코의 미소』를 읽고 작가의 다음 소설집『내게 무해한 사람』도 읽어 보자 한 건 표제작의 화자가 둘러쓴 위악이 얼핏 은희경 향수를 자극하는 데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10년 전 은희경 식 위악이 10년 후 문단에선 어떤 옷을 입고 춤을 추는지 궁금했다.

(첨언하자면 나는 위선보다 위악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먼저 동성애에 관하여. 나는 알고 있는 게 없기 때문에 달리 가치판단을 할 입장도 아니지만 영혼에 남녀노소가 있나, 염색체 나열이 생명의 존엄성보다 우선하는가 정도가 내 생각.

 

7편의 단편 중에서 괜찮았던 단편은 '그 여름', '아치디에서'.

'그 여름'은 겨울 해변에서 퍼올린 사금처럼 빛나는 문장을 아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아치디에서'는 일곱 단편 중 서사가 가장 성실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전반적인 감상은 작가와 소설집 모두 불편했다.

작가가 작중에 배치한 폭력의 구도가 매우 일방적이며 단 한 번의 전복없이 소설집 전체를 통해 일관되게 유지되는 것이 불편했고, 의도적인지 한계인지 동일한 소재와 주제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작가의 고집인지 근성인지도 또한 불편했다.

 

책 날개를 들추고 작가의 프로필을 여러번 확인한다. 1984년 생. 경기도 광명 출생. 고대 국문과 졸.

소설에서 학대 받는 여성을 둘러싼 사회 분위기만 보면 84년 생이 아니라 64년 생이 쓴 것 같은데.

 

기본적으로 일곱 편의 소설을 관통하는 공통 주제는 '여성'이다. 

그중에서도 작가가 집요하게 응시하는 초점은 여성'성'이 아닌 여성'자아'에 맞춰져 있다. 

등장하는 여자들 혹은 여자아이들은 결핍에 시달리고 있고 그리하여 불완전하고 홀로 서지 못하며 의지할 대상이 필요하다. 

 

작가가 천착하는 키워드는 단순하며 외곬으로 치닫는다. 

결핍. 외로움. 우울. 죽음. 

소설에서 외로운 인간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다. 계속 우울하거나 죽거나.

외로움은 우울의 등짝이고, 죽음은 우울의 귀소본능이다.

 

84년 생 작가가 쓰는 극단적인 남아선호, 남존여비에 공감하기엔 유감스럽게도 시대적 불일치가 자꾸만 발목을 잡는다. 84년 생이면 '아들 부모는 기차 타고 딸 부모는 비행기 탄다'는 소리를 들으며 자란 세대가 아닌가. '딸바보'가 대명사가 된 시대에, 딸은 딸년, 며느리는 며느님이라는 경로당 우스개도 이젠 철지난 유행어가 된 요즘 같은 시대에 오빠가 여동생을 샌드백 두들기듯 잡아 패는데 엄마 아빠는 거실에서 코미디를 보며 깔깔깔 웃는다는 내용은 지나치게 1차원적인 신파의 전형이다. 물론 좁으면 좁고 넓으면 넓은 이 바닥 어딘가에는 그런 끔찍한 집구석도 분명 있을 거다. 하지만 작가와 동시대 세대는 소위 '응답하라 1997' 이지 후남이 귀남이가 살았던 '아들과 딸'은 아니지 않은가. 단편 대부분이 같은 얘기를 반복하면 고개를 갸우뚱할 수 밖에 없다.


다시 말하지만 작가가 50년 대 생, 하다못해 60년 대 생이면 공감이 쉬웠을 거다. 실제로 우리 어머니 세대는 남아선호의 희생양으로 살았다. 그나마도 끝물세대지만.

 

연상의 남자들은 연인, 학교 선생, 오빠라는 이름으로 여자친구, 제자, 여동생에게 물리적/정식적 폭력과 학대를 일삼고 그들을 둘러싼 사회는 그것을 용인한다. 도대체 저들이 사는 시대는 언제적 시대인가.

 

소설 속에 드러나는 극단적인 글감들이 모두 84년 생 작가의 얘기라고? S에게 내가 느끼는 불편을 늘어놓으니 작가는 꼭 자기가 겪은 얘기만 써야 되느냐고 반문한다. 근데 작가가 모르는 얘기면 더 심각한 거 아닌가? 하물며 작가는 그것을 '리얼'이라고 형광펜을 긋는데?

S의 반문에 대답하자면, 알고 있는 이야기만 쓰라는 게 아니다.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갈등 요소들을 극단으로만 배치한 소설의 구성이 내겐 작가의 치기처럼 느껴졌다. 너도 열받지, 너도 화나지, 너도 참을 수 없지. 대놓고 공감을 강요하는 것 같아 불편했다.

 

2,30년 생 할머니들이 딸에게 며느리에게 남겨 놓은 이야기들, 4,50년생 그 딸들, 그 며느리들이 대물림된 여성차별, 여성학대와 때론 부딪치고 때론 주저앉으며 내 딸 만큼은 나처럼, 엄마처럼 살게 안 할 거라고 담담하게 웃던 이 땅의 어머니들의 육성을 들으면서 여성학 강의를 쫓아다녔던 학부 경험이 없었다면 나는 작가의 소설에 작가가 원하는 것처럼 공감하고 작가의 목소리에 동참할 수 있었을까. 글쎄, 그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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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다가 M에게 전화했다. 

 

감: 임화라고, 일제강점기 시절 경성 최고의 모던보이가 있었어.

M: 임화수?

감: 임화수는 누군데?

M: 이정재 왼팔.

감: ……임화라고, 배우도 하고 시도 쓰고 아주아주 잘생긴 모던보이가 있었어. 지금 활동했어도 톱스타는 찜쪄 먹었을 거야.

M:

감: 근데 해방 직후 월북했거든. 월북 이후엔 '전선에로!', '인민의 날개' 이런 선동시를 썼지. 그러다 결국 총살당했어. 당시엔 월북한 작가들이 많았고 그들 대부분 말로가 비슷했지만. 참 안타깝지. 인생이 원래 매순간이 선택이잖아.  

M: 

감: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영화를 만들고 배우로 활동하고 시를 쓰던 잘생긴 모던보이가 '깃발을 들어라' '진군하자!' 고 외치는 선동 시인이 되었다는 거야.

 

나는 특히 선동문학에 알러지가 있다. 계몽 포스터나 캐치프레이즈가 궁금하면 관련 책이나 문서를 찾아서 읽으면 된다. 추운데 이리 와서 커피 한 잔 하세요~ 불러놓고선 커피 한 잔의 대가가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면 화나지 않겠나.

 

본말전도(本末轉倒)는 말그대로 본과 말이 바뀌었다는 뜻이다. 목적이 우선시 되다 못해 나머지를 압도하면 초기의 의도는 의미를 잃기 마련이다. 작가가 일곱 편의 소설을 통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다. 하지만 개나리꽃을 좋아하는 걸 알아달라고 일주일내내 노란 원피스만 입을 필요는 없다. 과유불급이다. 소설가 이전에 여성인지, 여성 이전에 소설가인지 이쯤에서 작가가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라면 작가의 다음 소설도 돌림노래겠구나 한다.

 

최악의 선택만 하는 사람도, 최선의 선택만 하는 사람도 없다. 영화 <넘버3>에서 태주가 현지에게 으스대던 것처럼 대개 49:51에서 결론이 나는 게 인간의 삶이다.

  

다시, 생각한다.

 

A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한다. 어, 새털구름이다. 솜털구름이다. 뭉게구름이다. 먹구름도 있네.

B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한다. 어, 구름이네.

 

한 가지 얘기밖에 쓰지 못하는 건 어쨌든 작가에겐 불운이다.

 

 

그런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기대고 싶은 밤. 나를 오해하고 조롱하고 비난하고 이용할지도 모를, 그리하여 나를 낙담하게 하고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이라는 피조물에게 나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고 싶은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이야기해서만 구할 수 있는 마음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고. 나의 신에게 조용히 털어놓았던 밤이 있었다.

 

-p.209, '고백' / 최은영『내게무해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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