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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9612 bytes / 조회: 3,298 / 2019.10.20 16:06
[도서] 김영하『오직 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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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은 김영하의 소설집. 읽다 보니 혼자 재미있는 게 아쉬워서 읽다 말고 S에게도 들려주고, M에게도 들려주고.

저녁에「옥수수와 나」(뒷 부분)을 읽던 중엔 시트팩을 붙인 걸 깜박하고 푸하하-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이 아저씨, 썰이 정말 이렇게 재미있어도 되는 거냐고.

 

어차피 망친 시트팩일랑 뜯어내고 M에게 전화했다. 들어봐 들어봐... 내가 이거 읽다가 시트팩 붙인 것도 잊어먹고 웃음이 빵 터졌어. 내가 시트팩을 붙였거나 말거나 M은 엔딩만 궁금하다.

그래서 결말이 뭔데. 단편에 결말이 어디 있어, 그냥 그걸로 끝이지. 아, 근데 궁금한 거 있어. 청산가리를 먹으면 어떻게 돼? 죽기 전에 환각, 환상 그런 게 막 보이나? 그런 거 없고 먹으면 바로 죽는다.

 

글쿤. 이로써 엔딩에 대한 궁금증은 풀렸다.

 

김영하는 추리소설 플롯과 서사에 강한 작가다. 추리소설의 기본기가 탄탄하달지. 그의 소설은 대부분 추리소설의 구조를 취하고 있는데 독자 입장에선 소위 머리채 잡혀 끌려가는 형국으로 일단 시작하면 끝이 궁금해서라도 마지막까지 작가와 함께 달리는 수밖에 없다. 

 

아마 두 작가를 읽는 시기가 매번 어긋나서 그랬겠지만 소설집을 읽던 중에 새삼 김영하 식 추리소설의 발단 부분이 하루키의 소설과 유사하다는 기시감을 느꼈다. 그러니까 이런 거다. 일상성에 어느날 조그만 균열이 발생한다. 별 거 아니라 생각했던 균열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일상에 비일상을 끌어들이고 어느새 비일상이 일상이 되는 일상의 역설, 혹은 일상의 전복이 일어난다.

 

다만, 초기 플롯의 전개는 유사하지만 이후 풀어가는 두 작가의 방식은 물론 완전히 다르다. 김영하는 블랙코미디 (홈)드라마로, 하루키는 판타지로. 그렇지만 음악 좋아하고, 영화 좋아하고, 여행 좋아하고, 고양이 좋아하고, 직업적 작가 외의 정체성에도 관심이 많은 대중적으로 성공한 두 작가는 여러모로 비교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당사자들 호오야 알 수 없다만.

 

여하튼 이번 소설집도 마찬가지로, 고작 30-40여 페이지를 못 참고 결말이 궁금해 자꾸 뒷페이지를 넘기려는 손가락과 씨름하면서 읽었다. 결말? 당연히 그런 거 없다. 단편은 원래 그런 거다. 바게트빵의 가운데를 뚝 잘라 먹는 맛이지.

 

작가는 후기에서 세 편은 가볍고, 네 편은 (비교적)어두운 이야기라고 실토한다. 하지만 독자인 나는 세 편은 코미디, 네 편은 블랙코미디로 읽었다. 말그대로 '가까이서 보니 비극, 멀리서 보니 희극' 혹은 '가까이서 보니 희극, 멀리서 보니 비극' 인 이야기들. 이런 감상도 결국은 글을 쓰는 당사자인 작가의 태도에서 비롯된 영향이다. 분장을 한 광대는 웃어도 우는 것처럼, 울어도 웃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작가는 광대의 얼굴을 하는 것에 능숙하다.

 

「아이를 찾습니다」는 세월호 정국을 겪은 작가가 쓴 단편이다. 삶의 아이러니에 휘둘려 극단에 몰린 마지막 순간, 인간은 희망과 마주 선다. 그럴 땐 어쩔 수 없이 궁금해진다. 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희망을 급조해내는 것은 아닐까 하고. 수미쌍관 식 결말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럼 이러는 건 어때?"

"어떻게?"

"사장이 도저히 제정신으로는 출판할 수 없는 난해하고 어지러운 소설을 쓰는 거야. 제임스 조이스의『율리시스』같은 걸 써버려. 한 천 페이지쯤 되고 이렇다 할 줄거리도 없고 주제도 알기 힘든 소설 말이야."

"『율리시스』에는 줄거리도 있고 분명한 주제도 있어."

"사실 난 안 읽어봤어. 주제가 뭔데?"

"찌질한 중년 남성의 어지러운 성적 몽상."

"스탠리 큐브릭의 <아이즈 와이드 셧>하고 주제가 같잖아?"

"그렇지. 그게 사실 전부야.『율리시스』를 음란물로 판정했던 미국 판사는 뭘 아는 놈이었어. 가끔은 문학과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들이 작가들의 내면을 꿰뚫어 보기도 하지."

"그러니까 그런 걸 쓰란 말이야. 음란하면 더 좋겠네. 잘하면 사장까지 감옥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몰라."

"『율리시스』가 그렇게 쉽게 쓸 수 있는 소설이 아닌데."

"그러니까 못 써야지. 일부러 못 쓰는 건 쉽잖아?"

"그것도 쉽지 않은데…… 일정 수준에 도달한 나 같은 작가에게는 말야."

철학은 내 반박을 귓등으로 흘렸다.

"거꾸로 사장을 딜레마로 몰아넣는 거야. 역전 드라마지. 너야 원고를 넘기면 계약은 지키는 거잖아."

"음. 무려 천 페이지에 달하는 어지럽고 음란하고 실험적이면서 해체적인 소설이라."

"바로 그거야! 아마 절대로 출판 못할 거야. 하면 낭패고. 요즘 종잇값도 많이 올랐다는데."

철학이 신이 나서 박수를 쳤다. 우리는 건배를 했다. 철학은 난해하고 해체적이면서 음란한 소설로 사장을 곤경에 빠뜨리기로 한 것은 정말 좋은 생각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게다가 뉴욕까지 갈 필요도 없잖아."

철학이 자꾸만 뉴욕에 집착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문득 꼭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서 쓰면 되지 뭐.

 

-pp.140-141,「옥수수와 나」

 

 

 

가끔 작가가 자신의 소설 속 화자의 입을 빌려 다른 작가나 소설에 대해 수다를 떠는 장면을 만나는데 이런 단락들만 모아서 책으로 엮는 기획도 재미있을 텐데 싶다. 작가가 다른 작가의 얘기를 하는 건 늘 흥미롭다.

(* 인용글은 내가 시트팩 붙이고 깔깔깔 웃었던 장면은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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