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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7595 bytes / 조회: 3,495 / 2019.10.22 19:56
[도서] 심윤경『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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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몇 안 되는 국내 여성작가 중 한 사람인 심윤경은 다작을 하는 작가는 아니다. 2002년에 등단했으니 오히려 과작에 가깝다. 마지막으로 구입한 책이『서라벌 사람들』인데 찾아보니 이후 두 편의 소설을 더 냈다. (동화는 제외)

 

심윤경의 소설을 하나만 꼽으라면 역시『나의 아름다운 정원』이다. 동구는 귀하고 귀해서 눈으로 더듬는 것조차 아까운,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반짝이는 별 같은 아이였다. 그리고 작가는 17년 전 어린 동구에게 지웠던 성숙과 희생에 대한 미안함을 갚고자 어른들에게 자신의 언어를 거침없이 쏟아내는 아이 '설이'를 데리고 왔다고 밝힌다. 요컨대 아이에게 때이른 어른스러움이 아닌 제또래의 아이다움을 입혀주고 마음껏 외치게 하고 싶었다는 거다. 근데 제또래의 아이다움이 꼭 되바라지고, 앙칼지고, 위악의 형태여야만 했을까.

 

설이가 자신이 하나의 인격임을, 자아임을 드러내기 위해 선택하는 일련의 방식들이 불편했던 건 그 발산의 형태가 지나치게 위악적이기 때문이다. 초6학년 2학기에 접어든 여자애는 아이라인을 진하게 그리고 입술을 빨갛게 칠하고 가진 옷 중 가장 짧은 치마를 입고 학교에 간다. 그리고 자기를 얕잡아보는 아이들에게 욕을 하고 물리적인 힘을 쓰는데 거침이 없다. 초등학생 설이가 이럴 수 있는 건 설이가 주변 어른들을 기죽이는 소위 '공부 잘 하는 아이'이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시선으로 손짓으로 어른들과 소통하던 동구의 침묵이 설이의 요란한 자기 주장보다 더 힘이 세다. 동구는 사회적 기준으로 평범에 미치지 못하는 아이였고, 설이는 미디어가 탐낼 만한 비범한 아이이지만 두 아이가 보여주는 세계의 차이와 그 차이가 가져오는 감동의 반향은 너무나 선명하다. 원래 바위를 뚫는 물방울은 그것이 물방울이어서 강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1월 1일 새벽 쓰레기통에서 발견된 보육원 출신 윤 설은 사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지만 영어 원서를 읽고 원어민과 대화가 가능하며, 영재학교 입학 시험도 가뿐히 통과한다. 국어, 영어, 수학 같은 기본 과목은 늘 만점을 받으며 독학으로 중국어도 깨우친다. 이것이 초6학년 설이가 가진 비범함이다. 공부를 빼어나게 잘하는 아마도 영재 아니면 천재일 설이에게 함부로 구는 어른들은 없다. 학교 선생도, 학부형들도 모두 설이의 비행(非行)을 용인한다. 주변의 어른들이 설이에게 보여주는 선의는 간혹 지나쳐서 오히려 영악한 아이가 순진한 어른들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설이를 예뻐해야 하는가.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고민했던 부분이다.

 

다시 말하지만 비극적인 출생 스토리와 세 번의 파양 기록을 가진 고아 설이가 어른들에게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건 설이가 공부를 잘 하는 아이, 대한미국 학부모라면 누구나 탐낼 아이이기 때문이다. 이건 역설적으로 설이가 학습 능력이 뛰어난 아이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하게 하는 대목이다. 설이가 성적이 나쁘고 학습 과정을 제대로 쫓아가지 못하는 어눌한 아이였어도 어른들은 설이의 외침에, 눈물에, 상처에 관심을 가졌을까. 설이에게 관대했을까. ...곱씹다보면 어느 틈에 힘이 빠진다. 이런 것이 의미가 있는가.

 

어른들의 위선과 가면을 벗기기 위해 과연 '윤설'이 최선이었는가. 작가의 선택에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우화라기엔 세련되지 못하고 성장소설이라기엔 다소 작위적이다.

 

체호프의 충고를 옮겨본다.

 

달이 빛난다고 말해주지 말고, 깨진 유리조각에 반짝이는 한줄기 빛을 보여줘라
 

 

곽은태 선생님의 반석 같은 어깨 위에서 엉덩이춤을 추며 자랐을 시현을 한없이 부러워한 시간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도깨비방망이처럼 뚝딱 두드리기만 하면 무엇이든 이루어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부모의 어깨 위도 알고 보니 멀미 나게 흔들리는 곳이었다. 이 세상에 흔들리지 않는 어깨는 없다. 그렇게 당연한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한때 시현이 악마처럼 사악한 아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그 아이도 나처럼 격렬한 어지러움에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나서 더 이상 시현을 미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타인의 부러워하는 시선 속에서, 남들은 모르는 어깨 위의 흔들림을 견뎌야 했던 시현이 나보다 더 외로웠을지도 모르겠다.

 

-pp.270-271,『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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