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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14936 bytes / 조회: 2,819 / 2021.02.07 08:39
[도서] 막심 빌러『사랑하기 위한 일곱 번의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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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가 흐릿하여 후면 표지의 내용이 잘 안 보이는데, 옮기면 이렇다.


결국 열매 맺지 못하고 끝나는 스물일곱 편의 사랑이야기

쿨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읽는 이를 경탄하게 하는, 애매하기 그지없는 순간들

 

작가는 인터뷰에서, '나는 다만 들려주고 싶다. 두 사람 사이에 생겨나는 한순간이 얼마나 아름답고 깊으며 또한 얼마나 복합적인가 하는 것을'이라고 했는데, 책을 완독하고나니 인터뷰 내용 중에 공감이 가는 건 '얼마나 복합적인가' 이 한 대목이다. 소통 부재로 실패한 연애담은 아름답기는커녕 전혀 쿨하지 않을 뿐더러 더러는 막장이고 더러는 찌질하다.

 

화남금녀라고, 여자의 언어를 이해 못 하는 남자와 남자의 언어를 이해 못 하는 여자가 만나면 두 사람 사이에 생길 일은 뻔하다. 언성을 높여가며 제 말만 하다 결국 상대방 얼굴에 침을 뱉고 돌아서는 거지. 이 소설엔 이런 화남금녀가 가득하다. 그러니 당연한 얘기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남자와 여자에게 물리적 화학적으로 발생하는 여러 장면 중 특별히 아름답다거나 인상적이라고 느껴지는 장면은 없다. 아이러니한 건 바로 이런 이유로 이 소설을 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다.

 

스물일곱 편의 단편은 적게는 4페이지, 많게는 18페이지, 평균 10여페이지인데 단편인 걸 감안해도 분량이 매우 적다 싶은 이 소설집을 읽은 전반적인 감상은 '플롯은 넘치는데 서사가 없다'. 비유하자면 경찰서 사건 조회 기록을 읽은 기분인데, 딱히 줄거리로 요약할 만한 서사가 없다 보니 소설이, 혹은 작중 인물이, 혹은 작가가 말하고 싶은 바가 뭔지 좀처럼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쯤되니 독자가 이해하라고 쓴 소설이 아닌가 의심도 들지만. 어쨌든 이것도 일종의 하이퍼리얼리즘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작가의 집필 의도라면 매우 성공적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남자와 여자의 대화는, 그게 입으로 하는 거든 몸으로 하는 거든, 내내 일방적이어서 남자와 여자 누구의 입장에 감정이입해봐도 도무지 상황과 내용을 알아먹을 수가 없다. 마치 평행선으로 달리는 두 기차 사이를 커다란 방벽이 가로 막고 있는 기분인데 이러니 그 연애가 잘 될 리가 있나. 다른 대륙의 언어를 쓰면서도 비언어적 표현으로도 충만한 사랑에 빠지는 연인은 오히려 기적 같다. cf. 영화 <러브 액츄얼리>

 

스물일곱 개의 단편은 맥락이 상통하다 보니 결국 하나의 이야기를 정점에 둔 다양한 변주처럼 읽힌다. 따지고 보면 남녀가 만나고 헤어지는 사연은 대개 거기서 거기이기 마련이라 내 사연만 특별하고, 내 사연만 기구한 것 같지만 이도 저도 결국은 그냥 '사랑 타령'인 거다. 

 

사랑하려고 일곱 번이나 시도했다는 건, 결국 그 사랑이 별 거 아니었다는 걸까.

혹은, 일곱 번을 시도해도 포기가 안 될 만큼 그 사랑이 대단하다는 의미일까.

 

"만나는 사람, 있어?"

"아니."

"그렇지 뭐, 그게 뭐 중요한 건 아니니까."

"그렇지, 그게 중요하지는 않아."

"나, 다시는 프라하로 오지 않을 거야."

"이해해."

그녀는 울기 시작하더니 몸을 돌리고는 갔다. 그는 문에 서서 그녀가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발코니에 서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천천히 쇼피노바를 따라 내려갔고 세 걸음쯤 걷고 난 뒤 서서 울고는 다시 걷다가 다시 울면서 갔다. 

 

-pp.28-29, 「사랑하기 위한 일곱 번의 시도」

 

 

 

이 선집에서 한 편을 꼽으라면 마지막 목차「Ziggy Stardust」. 18페이지 분량인 이 단편은 그나마 기승전결이 뚜렷하다. 남자와 여자는 친구이자 연인이다. 데이트 중에 우연히 옛 연인으로 추정되는 지인을 만난 여자는 한달 뒤 약속한 시간에 남자가 있는 도시로 오지 않는다. 늦어질 것 같다는 통화가 마지막이다. 그리고 약속 시간이 훌쩍 지나 캄캄한 밤이 되도록 여자는 나타나지 않고 소식도 없다. 남자는 이 일방적인 이별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나는 이른 저녁까지 그녀를 기다리다가 프리드리히하인 시민공원으로 갔다. 풀밭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내 또래 남자 몇이서 축구하는 것을 보았다. 그해 들어 처음으로 맞이하는 따스한 저녁이었다. 바닥은 차갑지도 축축하지도 않았다. 어둠도 천천히 내려왔다. 어느새 나는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주위는 컴컴했고 공원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나는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아무 소식도 없었다. 나는 담배를 한 대 더 피우고 천천히 집으로 갔다. 그곳에도 에드나는 없었다. 

 

-p.262, 「Ziggy Stardust」

 

 

사랑이 스러지는 순간은 한낮의 빛이 차츰 온도를 잃고 그 자리를 저녁의 어둠이 메꾸듯이 '서서히 그러나 어김없이' 그렇게 온다. 인용한 장면은 읽을 때 기시감이 일었는데 기시감의 출처는 은희경 『태연한 인생』. 어떤 이에게 사랑이 끝나는 순간은 뜨거운 한낮을 견뎌낸 저녁노을을 닮았다. 외롭고 씁쓸하고 덧없다.

 

예전에 J가 그런 얘기를 했다. 대화 주제가 아마 권태였던 것 같은데, 최초의 연애감정이 지속되려면 계속해서 상대의 다른 매력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거다. 처음엔 그냥마냥 좋아서 좋아했다면 시간이 지나면서는 손이 예쁘고, 발이 예쁘고, 웃는 소리가 예쁘고, 성질내는 것도 예쁘고... 그렇게 계속계속 예쁜 게 보여야 된다는 거다. 그러면 최초의 연애감정이 지속된다나. 참고로 J는 M이 주구장창 나를 찼다고 주장하는 전남친이다. 드디어 이니셜등장!(tmi).

 

한쪽의 일방적인 변심으로 야기된 이별은 두 사람 모두에게 상처로 남는다. 누군가에게, 하물며 한때 좋아했던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기꺼운 사람은 없다. 하지만 사랑이 일생인 것 같고, 목숨인 것 같고, 그래서 영원처럼 느껴지는 고통도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진다. 그리고 상처에 새 살이 오르듯 느리게 느리게 어느 순간 회복된다. 오죽하면 관용적으로 쓰지 않는가. 연애는 사건이라고. 실패한 연애는 그냥 교통사고 같은 거다. 누구도 원하지 않았지만 누구도 피하지 못한 그런.


 

역자 후기에 공감가는 대목이 있어 옮긴다.


1960년 대에 태어난, 도시에서 삶을 살고 있는, 유목민도 정착민도 아닌 많은 이들의 불우한 사랑이야기. 작가는 자신을 발설하면서 발설 뒤에 자신을 철저히 숨긴다는 생각. 한 작가의 세계는 그 작가 자신이 아니라 그 작가가 만들어낸 세계라는 고전적인 아포리가 명명백백해지는 순간을 나는 다시 막심빌러의 책 번역을 마치며 경험했다. p.267

 

내용 중 '책 번역을 마치며'를 '마지막 장을 덮으며'로 고치면 내 감상과 일치한다.

 

 

 

'아포리'가 '아포리즘'의 오타인가 싶어 찾아보니 '논리적 궁지(난점)'라는 의미의 불어라고 한다.

++ 한번 도서관에 반납했던 소설을 다시 재대출해 완독했던 동력은 두 가지다. 역자가 故허수경 시인이라는 점, 소설 첫 페이지에 인용된 파스테르나크.


아마도 이 모든 것은 칠월에 일어나지 않았을까.

보리수나무에 꽃이 피니 말이다.

 

-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책에 부치는 편지」

 

 

그리고 파스테르나크 인용을 보는 순간 떠올랐던 브레히트.  

 

생각나는 건 단지, 내가 언젠가 그 얼굴에 키스를 했다는 것.

그 키스도 구름이 떠있지 않았다면,

오래전에 잊어버렸을 것이다.

 

- 브레히트 '마리아 A.의 회상'

 

취향 어디 안 간다고 이런 아포리즘 같은 문장에 한결같이 치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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