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기생충> >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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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14484 bytes / 조회: 2,545 / 2021.02.14 06:30
[영상] 봉준호 <기생충>


<기생충>을 비롯 92회 아카데미 작품상에 노미네이트된 영화를 연이어 봤던 무렵은 하필이면 홈이 주화입마에 빠졌을 때였다.

감상하는 것과 기록하는 건 별개의 문제이므로, 영화를 본 직후 관리자한테 요구했다. 

'메모장 같아도 되니 게시판 하나만 임시로 열어달라'(쨍알쨍알)

그러나 관리자는 모르쇠 신공을 펼치고 나는 흥, 됐소이다! 외치고 쓸쓸히 돌아섰다는 그런 비하인드.

 

그리하여 분명 영화를 봤으나 어디 가서 봤다고 말하지 못하는 홍길순 심정도 어느덧 희미해진 어느날의 일 그러니까 오늘 새벽의 일이다. 정리정돈 안(못) 하는 평소 습관 그대로 모니터 여기저기를 어지럽게 덮고 있는 sticker를 모처럼 정리하던 중이었다. 하나하나 삭제해나가던 어느 순간 눈에 확 띈 스티키 메모. 헐. 당시 영화를 보고 감상을 간단하게나마 스티커에 메모했던 모양이다. 도대체 언제 썼지. 전혀 기억이 안 나지만 과거의 나를 마구마구 칭찬해주자. 

 

그리하여,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나 이 영화 봤다고! (근데 정말 언제 썼지???)

 

 

기생충 Parasite (2019)│봉준호 

출연 : 송강호, 이정은, 이선균, 조여정, 최우식, 박소담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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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택(송강호)네 가족이 기사식당인지 함바 식당인지에서 밥을 먹는 장면에서였다. 기택이 박 사장의 운전기사로 취직하는 걸로 수다를 떠는 장면을 보는데 문득 마음이 굉장히 불편해졌다. 그러니까 기택네 가족이 박 사장네 집에 들어가는 순서가 기우 - 기정 - 기택 - 충숙 순인데 기택의 순서가 됐을 때 불쾌, 불편, 거부감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확 일었던 것이다. 이 부정적인 감정들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도 손톱아래 박힌 거스러미처럼 계속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 부정적인 감정의 정체는 영화가 끝나갈 무렵 알게되었다. 가난은 선(善)이 아니며 부는 악(惡)이 아니다.

 

<기생충>에 등장하는 세 가족의 역학적 관계가 흥미롭다.

일단 박 사장네와 반지하/지하 가족을 나누는 건 혈통이 아니라 자본이다. 그들의 역학적 관계를 이루는 본질은 계급이 아니라 계층이라는 의미.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층을 이동하는 사다리는 재물이다. 재물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라 재물로 형성된 지위는 영원불멸이 아니며 언제든 전복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기택과 문광은 굳이 박 사장의 것을 탐내지 않는다. 박 사장이 되기 위해 박 사장을 쫓아낼 필요도 없다. 그들이 부자가 되는 것과 박 사장이 가난해지는 건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기택은 박 사장이 부자인데 착하기까지 하다고 호감을 가질 수 있고, 근세(문광의 남편)은 박 사장을 리스펙트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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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기택과 문광은 어떠한가. 이 둘은 유산계급인 박 사장이 제공하는 일자리를 차지하려고 싸우는 무산계급이다. 기택과 충숙이 박 사장네 운전기사와 가정부가 되려면 기존에 있던 사람을 쫓아내야 된다. 일자리는 하나인데 일할 사람은 둘이니 어쩔 수 없다. 기택과 충숙은 두 사람을 모함해 쫓아내고 일자리라는 헤게모니를 차지하는데 성공한다.

 

재미있는 건 유사 계급투쟁(기성 계급을 몰아내고 신진 계급이 그 지위를 획득하는 것)을 거쳐 일자리를 얻은 기택이나 충숙과 달리 기우와 기정이 박 사장네서 자리를 잡는 과정은 표면적으로는 매우 평화로웠다는 거다. 차이가 뭘까. 기우와 기정은 위조하긴 했으나 '학벌'이라는 배경을 갖고 있다. 결국 기우와 기정은 쁘띠부르조아이기 때문에 부르조아 박 사장네에 무혈입성할 수 있었던 거다. 

  

<기생충>에서 눈에 띄는 건 세 가족이 모두 화목하다는 것이다. 이들 세 가족은 내부적으로니 외부적으로나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들은 자신들의 처지에 만족하며 일견 행복해보이기까지 한다. 그랬던 세 가족에게 위기가 닥친 건 그들의 영역을 나누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다. 박 사장의 '선(Line)' 얘기는 의미심장하다. '선만 넘지 않으면 괜찮다'던 박 사장의 말처럼 각자 자기 영역 안에 머물 때 그들의 공생은 순조로웠다. 그러므로 <기생충>은 어떤 의미에선 '영역'의 얘기다. 이 영역이 무너지면서 세 가족은 걷잡을 수 없는 비극으로 치닫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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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우가 쏟아지는 밤, 문광이 저택의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와 함께 <기생충>의 서사는 전반과 후반으로 나누어진다.

이 순간이 보여주는 메타포는 더없이 선명하다. 박 사장네가 캠핑으로 집을 비우자 기택네는 빈 집을 차지하고 박 사장네 흉내를 낸다. 그리고 기다렸다는듯이 쫓겨난 문광이 저택 안으로 들어온다. 법적용어로는 '주거침입'이고 다른 말로 '영역침범'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자기 영역을 벗어나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는 순간 영역의 주인이 돌아온다.

 

<기생충>에서 '선만 안 넘으면 괜찮다'는 대사 다음으로 흥미로웠던 대사는 '냄새'다. 흔히 가난과 재채기와 사랑은 못 감춘다고 하는데 가짜 신분과 깨끗하게 다려입은 옷과 현학적인 말투로도 숨겨지지 않는 냄새는 기택네의 가난, 즉 박 사장네와 기택네를 가르는 본질을 함축하는 '무엇'으로 보인다. 

 

영화의 클라이막스에서.

기택은 자신의 딸에게 칼을 꽂은 근세가 아닌 근세의 냄새에 코를 틀어막는 박 사장에게 달려든다. 그순간 딸의 죽음보다 반지하/지하의 냄새를 못 참는 박 사장의 태도에 기택은 더 분노했던 것이다. 대개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건 오물이다. 박 사장의 태도에 기택은 자신이 오물로 치부되는 그리하여 자신이 훼손당했다고 느꼈던 걸까. 동서고금 수많은 고전이 노래하지 않았는가. 인간의 존엄은 죽음보다 강하다고.

 

영화가 끝나고 두 가지 의문이 남았다. 평론가들이 떠드는 자의적 해석 말고 제작진의 공식 코멘터리로 듣고 싶은 의문인데 하나는 기택의 얼굴이 영화가 진행될수록 점점 붉어지는 이유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냄새'다. 근세의 냄새에 코를 틀어막는 박 사장에게 칼을 찌르기 직전 기택이 느꼈던 감정의 실체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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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봐도 잘 찍은 그림이라 손가락을 꼽는 게 귀찮을 정도지만 기택네가 폭우를 뚫고 반지하 집을 찾아가는 장면은 정말 훌륭하다. 이 장면 말고도 입을 살짝 벌리고 몰입해서 본 장면이 제법 많다. 이미 다른 누가 그런 장면을 찍었든 말든, 어디서 본 장면이든 말든 잘 찍은 건 잘 찍은 거다.

 

유럽과 북미에서 연일 수상 소식이 들려와도 그러려니 하다 오스카 노미네이트 소식을 듣고 오스카 라이브 전에 영화를 봐야겠다는 의무감이 치솟았다. 오스카의 힘이란...; 내친김에 작품상 노미네이트작 <결혼이야기><아이리시맨>까지 봤고, 세 편을 연이어 보고 나니 확신이 들었다. <기생충>은 웰메이드이며, 외국어영화상은 따놓은 당상이고, 어쩌면 각본상도 받겠다, 하였다. 외국어 영화라 작품상이나 감독상은 아예 기대도 안 했는데 오스카 본방을 보면서 'Parasite'가 호명되는 순간은 정말 기절하는 줄 알았다. 이런 때 국뽕을 못 느낀다면 그건 외국인이지.

 

대학 신입생 시절, 과 오티 뒷풀이가 끝나갈 무렵 한 선배가 집에 데려다 주겠다고 사는 곳을 물었다. 경기고 근처요. 아, 그 동네 물좋지. 그렇게 시작된 동네 투어는 종로구 어느 동네에 이르렀다. 거긴 높이 올라갈수록 부자야. 그동네는 아래쪽에 사는 부자가 위쪽에 사는 부자를 부러워해. 누군가 웃으며 말했다. 

 

 

 

+

영화를 볼 때는 이런 생각 없이 봤는데 막상 리뷰를 쓰고 보니 이건 어딜봐도 맑시즘 관점이다. 일종의 퇴고 기능으로 리뷰를 읽으면서 내가 쓴 글인데도 황당했다. 그리고 당황했다. 영화를 볼 땐 정말 이런 생각은 1도 안 했는데 왜 이런 리뷰가 나왔을까. 기억을 뒤져보면 영화를 볼 때 대충 이런 생각을 했다. 부자 한 명이 가난한 사람 여럿 먹여살리는구나, 제목 참 잘 지었네, 박 사장 죽고 연교는 어떻게 살았을까, 기택은 언제까지 지하에서 숨어 살까, 집 좋네, 저 돌은 뭘까, 기우 친구는 이후 기우랑 절교했을까, 의사랑 형사랑 캐릭터가 너무 작위적인데, ost가 완전 내 취향이군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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