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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15 bytes / 조회: 2,925 / 2021.03.03 18:15
[도서] 윌리엄 트레버『비온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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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후면 표지를 가득 메운 동료 작가들의 헌사. 말그대로 상찬의 만찬. 내게만 생소한 작가였던 모양이다.

 

책을 읽는 중에 집중이 자꾸 흐트러지는 이유를, 처음엔 풍속소설이라 그런가 했다. 그리고 페이지가 제법 넘어간 후에야 밀도가 떨어지는 문장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서와 대조해보지 않아 소심한 얘기지만 주부와 술부의 연결이 매끄럽지 않거나 의미가 불분명한 문장들, 모호한 맥락 등 번역의 신뢰도가 떨어지는 정황들로 인해 이런 의심은 거의 확증에 가깝다. 게다가 역자의 다른 책으로 경험한 바, 의심할만한 전범이 이미 너무 많다. 오래전에 정영목은 믿고 읽는 번역가였으나 언제부터인가 지뢰찾기 게임에서 퀘스천마크를 꽂은 큐브처럼 느껴진다. 특히 줄리언 반스일 때 이 퀘스천마크가 폭탄일 확률은 절반 이상이다. 물론 이런 추측에는 윌리엄 트레버를 장식하는 수많은 상도 한몫 한다. 상의 권위가 장식은 아닐 터.

 

(내겐) 생소하고 낯선 윌리엄 트레버라는 작가가 이런 소설을 쓰는 구나- 감이 온 건 「실추」를 읽을 때였다. 아울러 몇 개의 단편을 읽는 동안 느꼈던 동일한 메시지가 보다 선명하게 드러났던 단편 역시 「실추」였고. 「실추」의 배경부터가 그러하다. 개신교와 카톨릭. 두 종교 모두에게 따돌려지며 집단 속에서 홀로 yes 혹은 no라고 외쳐야 하는 아이. 이야기의 메타포로 등장하는 소설적 장치는 종교이며 '종교'의 성격이 으레 그렇듯 갈등은 첨예하며 나락으로 향하는 결말도 비교적 또렷하다. 종교 갈등 뿐만 아니라 다른 단편에서 다루었던 세대 갈등, 소통의 부재에서 오는 외로움도 여지없이 등장한다.


67세의 작가가 쓴 단편은 주변 - 사람과 사물을 관조하는 노작가의 태도가 가감없이 정직하게 읽힌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쉽게 체념하며 그리하여 결국 순응적이다. 배우자의 죽음에도, 연인의 배신에도, 아들의 거짓말에도, 자신에게 사기를 치려는 이웃의 거짓말에도 이들은 다만 고요하다. 하지만 순응이란, 다른 방향에서 보면 저항 혹은 반항이라는 의미이기도 하여 한편으론 고요한 분노처럼 읽히기도 한다. 신 포도를 포기하고 돌아서는 여우의 뒷모습에서 느끼는 게 어디 후련함 뿐이겠는가.

 

이렇듯 나머지 단편이 현실 순응적이어서 결말이 평화로웠다면, 그걸 과연 평화라고 불러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순응을 거부하고 저항했던 밀턴의 결말은 그리하여 나락이고 비극이다. 

 

이 단편의 제목 '실추'의 원제가 궁금하여 원서를 찾아보니 원어 제목은 'lost ground'다. 밀턴의 '실낙원(paradise lost)'과 연관이 있는 걸까. 다른 단편은 원어 그대로 직역했는데 왜 이 단편만 의역인지, 그것도 원어를 전혀 연상할 수 없는 제목인지 역자의 의도를 모르겠다.

 

트레버의 단편집을 읽으면서 인상적이었던 건, 화자의 상상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전-결'의 전개. 영화 용어 페이드 아웃을 연상케하는데, 갈등이 절정에 달하면 장면은 화자의 생각 혹은 상상으로 메꾸어지고, 장면은 여백으로 비워둔 채 이야기는 완결을 맺는다. 그 자리에 남은 건 예언처럼 남은 화자의 상상과 독자다. 이제 독자는 이어질 다음 상황을 화자의 상상에 기대어 미루어 짐작하는 수밖에 없는데 이는 마치 이야기의 완결은 독자가 맺으라고 작가가 턴을 넘긴 듯 느껴지기도 한다. 

 

마침 현대문학에서 나온 트레버의 단편집이 책장에 있다. 출판사의 배려인지 고맙게도 한겨레출판의 단편집과 겹치는 단편이 없다. 영국의 보석이라는 작가 트레버의 소설에 대한 감상은 이 단편집을 읽어본 뒤 마저 하는 걸로 일단 미룬다... 

 

역자 후기에 '열반처럼 고즈넉하게 가라앉은 세계'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 단편집에 잘 어울리는 형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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