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삭 <미나리> *스포 잔뜩* >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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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20334 bytes / 조회: 2,421 / 2021.03.23 16:49
[영상] 정이삭 <미나리> *스포 잔뜩*


 

 

*주의. 스포일러로 가득합니다. 영화를 아직 안 보신 분들은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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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영화에 대한 반응이 호의적이며 고무적이라는 소문을 들은 건 약 1년 전이다. 이후 1년 동안 눈에 보이는 성과를 차곡차곡 쌓아올리고 있는 <미나리>. 이젠 오스카만 남았다. '상'은 결실에 대한 보상이다. 상을 타면 축하해주고, 축하받는 것이 당연하다. 기쁘고 좋은 일을 '고작 수상에 연연해한다'고 뭐라고 하지 말자. 박수 좀 친다고 손바닥이 닳는 건 아니잖나.

 

봉준호는 오스카를 남의 나라 로컬 영화제라고 했지만, 오스카가 전지구적 상업영화의 대중성과 흥행을 가늠하는 최종 봉우리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그때문에 수상 여부가 궁금하고 기대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사실 인종, 문화, 언어가 다른 남의 나라 한복판에서 그 나라 최고 권위의 상을 받는다면 대단한 일인 거 맞다. 안 받으면 또 어떤가. 어차피 남의 나라 로컬 시상식인데...... 라고 쓰고 보니, <미나리>는 미국영화이니 로컬영화제가 아니구나. 그렇다. <미나리>는 한국 배우가 출연한 미국영화다.

 

 

first of all

영화 얘기를 하기 전에 먼저 중요한, 확실히 짚고 넘어가고 싶은 건 <미나리>의 영화적 정체성이다.

<미나리>는 골든글로브에서 외국어 영화상을 제외한 본상 노미네이트에 제외되면서 미국내에서 불공정 논란을 일으켰다. 처음 이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미국이 제작하고 미국이 투자한 미국 영화인데 왜 외국어영화상이냐는 논란이 있다'는 정도로만 이해했다. 그리고 영화 오프닝이 시작되자마자 이성에 앞서 직관적으로 바로 알았다. <미나리>는 미국 헐리우드 영화가 맞다. 

 

인간처럼 영화도 특유의 언어와 문법이 있다. <미나리>의 영화적 언어와 문법은 재고할 여지 없이 헐리우드산이다. 덕분에 '헐리우드가 제작하고 만들었다'는 의미를 나도 이번에 새롭게 깨달았다. 뒤집어 말하면 한국 배우가 등장하고 한국어 대사가 나오니까 당연한듯 관성적으로 <미나리>가 한국영화라고 생각했던 것도 이런 사실을 간과한 내 고정관념일뿐.

 

 

1. 이민자 이야기

<미나리>는 이민 가정이 미국에 정착하는 이야기를 한다. <미나리>가 미국영화라고 느낀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민자의 얘기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민자는 국적을 제거한 이민자다. 제이콥 부부의 모국이 한국이 아닌 다른 동남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어느 나라여도 상관없다는 의미다. 영화에서 한국적인 것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순자가 한국에서 가지고 온 식재료, 화투, 민간요법 등인데 그에 대한 설명이 따로 없어도 영화가 진행되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 영화의 시선이 주목하는 건 낯선 땅에 도착한 이방인이 어떻게 그 땅에 적응하고 정착하는가, 이기 때문.

미국은 태생부터가 이민자의 나라이며, 모든 이민자들의 새로운 모국이다. 다양한 국가에서 몰려든 이민자들의 후손으로 이루어진 미국이 <미나리>를 보면서 공감하고 감동받는 배경이 이해가 간다.

 

 

2. 기독교 세계관

이민자들이 타국에서 결속을 다지는 첫번째 관문이자 지나칠 수 없는 커뮤니티는 바로 '교회'다. 교회는 정보를 얻고, 도움을 받고, 낯선 타국에 뿌리를 내리는 데 도움을 받는 역할을 한다. 종교가 없거나 혹은 타종교가 있는 사람도 이민 초기에 교회를 찾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일요일마다 빵과 간식을 먹으러 교회에 가는 군 훈련병도 그에 다름 아니다. 여튼.

 

<미나리>는 영화 전반에 기독교 세계관이 녹아있는 것이 느껴진다. 한 예로 제이콥(야곱), 데이비드(다윗), 폴(바울)의 이름이 우연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하물며 데이빗에게 제일 처음 말을 거는 친구도 존(요한)이다. 재미있는 건, 이름의 나열에서도 알 수 있듯 성경 속 인물들을 연상케하는 이름들이 남자에 국한된다는 것이다. 페미니즘 시점을 빌리자면, 성경의 역사가 남자들의 역사이기 때문일까. 

이민 가정에서 자란 경험을 토대로 각본을 쓰고 연출을 한 감독의 이름부터가 '이삭'이니 당연한 얘기인가 싶지만, 무엇보다 영국 구교의 박해를 피해 메이플라워를 타고 온 청교도인들이 상륙하며 역사를 쓰기 시작한 나라가 미국 아닌가. 서양 예술 문화가 신화와 성서에 빚을 지고 있느니만큼 미국 대중문화 역시 기독교 세계관을 빼고 얘기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3. 물과 불

성경에서 불은 소멸, 물은 생명을 의미한다. 참고로 불은 예언자의 모습을 하기도 하니 이중적인 의미일 수도 있겠다. 새로운 땅에 도착한 제이콥은 내내 물을 얻기 위해 고전한다. 첫수확한 작물을 화재로 모두 잃은 다음 장면은 수맥을 찾는 제이콥의 모습이다. 

여담인데 활활 타오르는 창고를 뒤로 하고 끌어안은 제이콥과 모니카의 모습에서 얼핏 불길에 싸인 소돔이 연상됐다. 천사의 경고에 모든 것을 두고 소돔을 도망쳐나온 롯 부부가 연상되어서일까. 비록 롯의 아내는 소금기둥이 되었으나 소멸 이후는 부활이듯 나는 제이콥과 모니카가 다시 일어서겠구나 희망을 보았다.

 

 

4. 데이빗 혹은 다윗

소년장사였던 다윗과 달리 데이빗은 선천성 심장 질환을 갖고 태어나 뛰면 안 되는 아이다. 병아리감별사인 제이콥은 아들 데이빗에게 숫병아리를 폐기하는 이유를 '맛도 없고 알도 못 낳고 아무 쓸모가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며 '그러니까 우리는 꼭 쓸모가 있어야 된다'고 얘기한다. 무쓸모의 쓸모. 쓸모의 무쓸모. 정답은 없다. 중요한 건 과정이다.

 

 

5. 천국을 본 아이

모니카는 데이빗에게 꿈에서 천국을 본 아이 얘기를 들려준다. 성경에서 꿈에서 천국(의 문)을 본 건 야곱(제이콥)이지만, 데이빗은 꿈에서 천국을 보는 것도 싫고 죽는 것도 싫다. 그런 손주를 끌어안고 다독이는 순자. 그날 밤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다음날 순자는 뇌졸중으로 일어나지 못하고 병원에 입원한다. 그리고 순자가 쓰러진 날을 기점으로 이후 데이빗은 병원 정기 검진에서 반가운 소식(굿 뉴스)을 듣고, 제이콥은 그토록 염원하던 납품 계약을 맺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은 예의 창고 화재.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장면에서 요나의 수난이 떠올랐는데 줬다 뺐고, 뺏었다 다시 주는 새옹지마가 마치 기독교 신이 인간을 길들이는 방식처럼 보인달까. 기독교 신의 은총을 받은 땅에 뿌리를 내리려면 그 땅의 방식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계시처럼 보이기도 한다. 토착민에게 익숙한 방식은 이방인에겐 낯선 방식이다. 이방인이 토착민이 되려면 자신의 방식을 버리고 토착민의 방식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을 우리는 '동화(同化)'라고 부른다.

 

 

6. 이민 1세대

결론적으로 화재 이후 제이콥네의 모습은 새로운 땅에 완전히 정착하는 이민자의 미래를 암시한다. 인상적인 건 영화 초반 제이콥이 데이빗을 데리고 자신의 방식으로 물줄기를 찾아 땅을 파던 것과 다르게 영화 말미는, 그러니까 화재 이후 제이콥은 그가 뿌리를 내리려는 땅의 정착민이 수맥을 찾는 방식을 받아들인다. 제이콥의 곁에는 이제 모니카와 폴이 함께 있다. 제이콥은 비로소 이민자가 될 준비가 된 듯 보인다. 그의 아들과 딸은 이민 2세대로서 이민 1세대인 부모가 어렵게 뿌리를 내린 땅 위에 단단한 토대를 올리게 될 것이다. 뛰면 안 되던 데이빗이 때가 왔을 때 뛸 수 있었던 것처럼.

 

 

7. 결속

<미나리>는 미국영화지만 나는 한국인이라 당연히 한국인으로서 감상을 느끼는 지점이 있다. 예를 들면, 저 가정이 한국에 있었다면 깨졌겠구나. 그치만 미국이라서, 남의 나라여서, 남의 나라에서 믿고 기댈 것이라곤 서로 밖에 없어서 깨지지 않는구나. 같은 거.

 

 

8. 7의 연장...

모국에서나 남의 나라에서나 고생하는 건 똑같은데...., 거기다 인종차별을 감내하고, 유색인종의 머리를 받치고 있는 유리천장과 싸워야 하고, 향수병으로 뒤척이면서까지 왜 이민자가 되는 걸까. 그리고 든 생각은, 모국에선 가난과 고생이 부끄럽고 창피하고 자존심 상하고 숨기고 싶은 치부이지만 남의 나라에서 하는 고생은 당연한 거라 치부가 아니겠구나, 라는 거.

 

유학 시절 절친이었던 재미교포 H의 부모님은 세탁소를 하셨다. 이민 전 부모님 직업은 교수였고. 뉴욕에선 흔한 얘기라 얘깃거리도 안 되는 일이지만 교수직을 때려치고 세탁소를 하다니 우리나라였으면 아마 주변 등쌀에 지레 말라죽지 않았을까.

 


9. 의문

제이콥과 모니카는 10년 전에 미국에 왔지만 관객은 그 사연을 알 수 없다. 왜 도시를 버리고 한국인이 없는(=드문) 외지 시골로 왔는지도 알 수 없다. 영화는 오롯이 제이콥 가족이 도시를 떠나 광활한 대지로 왔고 그곳에서 땅을 일구고 경작하고 정착하는 과정에만 집중한다. 이야기가 기승전결을 충분히 갖추었기 때문에 담백한 영화적 서술이 불편하지도 어렵지도 않다. 그럼에도 영화 전체를 통틀어 궁금한 의문이 남는다. 

바로 이것. 

제이콥은 왜 그토록 농경에 집착하는가.

 

제이콥은 병아리 감별사로 돈을 꽤 벌었다는 언급이 있다. 그러니 짐작할 수 있는 건 돈이 목적이라면 제이콥이 도시를 떠나 시골땅에 정착하지 않았을 거라는 거다. 같이 도시로 떠나자는 모니카에게 '아빠가 뭔가를 해내는 걸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말하지만 왠지 이것도 표피적인 언어일 뿐 제이콥이 경작을 하려는 이유를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그럼 질문을 바꿔 보자. 제이콥은 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룰 기반으로 땅을 선택했는가. 

'대지'는 많은 상징과 은유를 갖고 있는 대표적인 명사다. 그리하여 다시 한번 상기한다. 이 영화는 이민자의 이야기라는 걸.

 

 

9. 결론

소품 같은 영화다. 책으로 치면 깔끔한 단편 한 편을 읽은 기분이 드는 영화 <미나리>는 모든 이야기를 시시콜콜 다 하지 않는다. 생략된 이야기가 많지만 플롯이 단순해서 영화를 쫓아가는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 일종의 연대기처럼 시간 위에 띄엄띄엄 점을 찍고 그 점을 밟아가는 느낌이다. <미나리>와 관련하여 스치듯 본 표현인데 '유기농'이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 

 

미국영화 <미나리>에서 '한국의-'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순자가 유일하다. 우리에게 익숙한 할머니이지만 아마도 미국인은 생소하게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배우 윤여정의 수상 소식이 들릴 때마다 반갑다. 윤여정의 수상 소식을 들으면 '메이드 인 코리아'가 상을 받았다는 기분이 드는 거다.

 

 

10. 번외 : 

무쓸모잡담 I

영화 <미나리>에는 숲속 외진 곳에 미나리가 서식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걸 보니 엄마가 시애틀로 고사리를 뜯으러 가던 게 생각난다. 미국인은 고사리를 먹지 않는데 시애틀 어느 야산에 고사리가 자라는 서식지가 있다. 그리하여 고사리 철이 오면 한인들이 당국에 허가를 받고 관광가듯 시애틀 야산으로 고사리를 뜯으러 간다. 나는 시기가 안 맞아서 못 가봤지만 '할머니 냄새'라는 데이빗의 대사가 유독 와닿았던 건 이런 에피소드들 때문이다. 새로운 것에 익숙해지고 어느 순간부터 그것이야말로 내 것인 듯 원래 내 것을 잊어버리지만 그럼에도 잊혀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방심하고 있을 때 미각과 후각과 청각으로 우리의 근원을 일깨운다.

 

무쓸모잡담 II

작업장에서 뜻하지 않게 만난 한국인 여자가 '한국 교회를 벗어나려고 시골로 왔다'는 말을 한다. 그 대사에 담긴 정서를 정말이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던 건 한인타운에 한인교회가 많아도 정말 너무 많기 때문. 한 블록 안에 서너 개 교회가 밀집한 모습을 보면 감탄 이전에 질린다. 관련해서 하고 싶은 얘기가 더 있지만 tmi라 이건 다음 기회에.


 

 

이것이 놀라운 것 아닌가요?

살아왔다는 것. 

그것도 이 나라에서, 이 시대에, 우리로서.

이것이 놀라운 일입니다.

 

- 필립 로스 『미국의 목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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