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카르추크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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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9949 bytes / 조회: 2,518 / 2021.05.17 00:01
[도서] 토카르추크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스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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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올가 투카르추크ㅣ이욱진 옮김ㅣ민음사

 

 

 

* 이하『죽은 이들』로 통칭함.

 

그래서 두셰이코는 행복해졌을까? 선과 악의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

토카르추크가 우리에게 묻는다.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p.386, 역자 후기

 

질문을 했으니 대답을 하자면, 두셰이코는 행복해지지 않았다. 행복해질 수가 없다. 사냥꾼들이 죽었다고 해서 죽은 '어린 두 딸'이 살아서 돌아오는 건 아니니까. 두셰이코는 정의를 실현한 게 아니라 복수를 했다. 그리고 감히 단언하건대, 행복해지려고 복수를 하는 사람은 없다.

 

설 게시판에도 썼지만 페이지를 넘기는 동안 나는 작가가 점성학 신봉자인가..., 조금 더 나아가서 점성학 광신도인가 내내 의심했다. 예를 들어 유럽인이 우연히 한국인 작가의 소설을 읽는다고 상상해보자. 주인공은 만세력을 끼고 사는데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만세력을 펼쳐 들고 갑진일주가, 정관이 충을 받아, 신약 신강이 극하니, 월주가 원국이 편인이 관살이... 블라블라 하는 추리 소설. 유럽인의 입에서 헐 소리가 절로 나오지 않겠는가.

 

다행히 두셰이코의 사랑스러운 제자 디지오가 사랑스러운 질문을 한다. 

(설舌 게시판 '생태주의의 유머스러움'에서도 언급함.)

 

단테의 『신곡』「지옥편」에서 베르길리우스가 말했죠. 점성가들에게 목을 끔찍하게 뒤트는 형벌이 내려졌다고요."

참다 못한 디지오가 나의 장황한 설명을 멈추기 위해 말했다.

-p.176

 

 

작가와 다른 국가, 다른 문화권에 사는 해외 독자로서『죽은 이들』을 읽는 동안 독서의 가장 맹점은 바로 '점성학'이었으니. 작가가 평소 점성학에 관심이 있느니만큼 성덕이겠거니 이해 못할 것도 없다만, 다국적 문화의 언어로 번역되어 읽힐 소설로는 아무래도 한계가 보인다. 점성학에 관심 많은 지도 상의 대륙을 생각하면 이런 불평쯤이야 지나가는 개미가 눈깜박이는 소리로밖에 안 들리겠지만은.

 

별자리라고는 북두칠성 밖에 못 알아보는 까막눈으로 어찌저찌 소설을 완독한 건 어쨌든 이 소설이 추리소설 형식을 갖고 있기 때문. 점성학 얘기를 빼면 페이지 사이사이 눈길을 끄는 문장도 있고.

 

별이 가득한 하늘에서부터 인간의 도덕적 양심에 이르기까지. 가차 없고 예외 없이 엄격한 법들이 지배한다. 출생에 질서가 있는데 죽음이라고 질서가 없겠는가?

-p. 86

 

 

한동안 나는 고속 도로 설계를 맡은 개신교 신자와 동거했는데, 그가 마틴 루터의 명언 중 한 구절을 인용한 적이 있었다. 

"고통받는 사람은 신의 뒷모습을 본다."

나는 여기서 뒷모습이란 게 등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엉덩이를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신의 앞모습조차 상상하기 힘든데 뒷모습은 과연 어떨까. 어쩌면 이 말은 고통받는 사람은 일종의 쪽문과도 같은 특별한 창구를 통해 신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축복을 받으며, 고통 없이는 이해하기 힘든 진리를 포착하게 된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그러므로 어떤 면에서 보면 건강한 사람이란 결국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이다.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해서 결국 삶의 조화와 균형이 맞춰지는 법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pp.164-165

 

 

 

그 시간에, 그 장소에 있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 점성학이든 명리학이든 결국 결정론적 운명론인데 이런 운명론은 미래를 미리 볼 수 없어 불안한 인간에게 훌륭한 자기위안 혹은 변명이 된다. 내가 순응하든 저항하든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어.' 하는 거다. 문제는 우연조차 운명으로 밀어넣는 무지막지한 인간의 오기.

어쩌면 두셰이코는 더 행복해질 수 있었을 거다. (정서적으로)더 윤택한 삶을 살 수도 있었을 거고, 마음이 통하는 친구들과 평범한 일상을 떠들 수도 있었을 거다. 두셰이코가 그러지 못했던 건 별자리도 출생일시도 아닌 그냥 두셰이코의 성격 탓이다. 달리 지팔지꼰이라는 용어가 있겠는가.

 

의외롭달까 재미있다고 생각했던 건 작가도 역자도 소설의 결말에 대하여 독자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윤리적 고민을 하는 부분. 글쎄, 홍길동이 의적인 우리나라에선 그런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다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복수는 자신을 포함해 아무 것도 구하지 못한다는 거다. 이는 두셰이코는 행복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근거로 이어진다.

   

평소 텍스트에 관한한 인내심이 중간은 된다고 생각해왔는데 『죽은 이들』은 방지턱이 제법 높았다. 덕분에 거의 옆구리에 끼다시피 하고 읽었는데 침대 옆에 두고 자기 직전에 읽고, 일어나자마자 읽었다. 그렇다고 하루 종일 읽었다는 얘기는 아니고, 일종의 오기로 완독했다는 얘기. 방지턱은 물론 점성학이다. 이 방지턱을 쉽게 넘을 수 있는 독자라면 『죽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소설적 재미와 작가의 사유와 철학을 가볍게 즐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죽은 이들』은 토카르추크가 기존에 쓰던 것과 작풍이 다르다고 하니 작가의 다른 소설을 읽어봐야겠다.

  

+

설(舌) 게시핀의 '생태주의의 유머스러움'을 리뷰에 합쳐야 하나 잠시 고민. 작성할 때는 아무 생각 없었는데 지금 읽어 보니 저걸 왜 잡설에 썼는지 과거의 나를 모르겠다; 

...기왕 쓴 거니 이대로 놔두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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