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벨 에포크 시대의 초상'이 이 책의 정체성을 잘 설명한다.
시대를 견인하는 예술가가 있는가 하면, 시대가 낳은 예술가가 있다.
책을 통해 내가 느낀 끌로드 드뷔시는 말하자면 시대가 낳은 예술가.
세기말 혹은 세기초 파리.
1999년 전지구적으로 밀레니엄 버그가 한창 화두였던 때가 있었는데 이런 분위기는 1세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특히 산업혁명 이후 본격적으로 격변기를 맞은 시대에 들어선 당시 음악과 미술은 한마디로 세기말 혼란을 자양분 삼아 태어나고 자라고 활동한다.
책을 읽는 동안 수시로 드뷔시의 곡을 찾아서 들었는데 감상의 결론은, 스토리텔링이 너무 강해서 순수하게 '감상'을 위한 '감상'이 힘들다-, 는 거. 그러니까 나는 그랬다.
드뷔시의 대표작이 '달빛'인 데는 이유가 있다. 이 피아노곡은 그나마 안정적으로 편하게 감상할 수 있다. 난해하다는 점에서 전혀 다른 감상을 느낀 '목신의 오후의 전주곡'과 비교하면 특히 그러하다. '목신의 오후의 전주곡'에 부연하면, 드뷔시는 말라르메의 장편시「목신의 오후」를 읽고 영감을 받아 작곡했고, 천재 무용수 니진스키는 이 곡으로 안무를 창작하고 공연했다. 시인과 작곡가와 무용수의 공통점은 '난해하다'는 것이다. 범인인 나는 그들의 교감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울 뿐.
후에 이러한 애국심은 점점 더 고무되었고, 제 1차 세계대전이 닥쳐옴에 따라 더욱 존재감을 드러내게 되었다. 1913년에 쓰인 드뷔시의 마지막 전주곡 '불꽃(Feux d'artifice)'에는 오른쪽 악보에서처럼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가 등장한다. -p.326
세기말 파리를 세기말 빈과 비교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은데 이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아나키즘이 지배하는 것 같던 빈과 달리 파리는 프랑스인, 범위를 좁혀 파리 시민의 민족주의가 두드러지는 경향이 보인다. 이는 아마 책의 표제로 나선 드뷔시 때문일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중에서도 드뷔시의 애국심은 애국주의를 넘어 얼핏 국수주의 경향이 보인다. 물론 이 또한 책을 쓴 저자의 시각에 따른 것일수도 있으므로 판단에 어느 정도 유연성을 두는 태도가 필요할 것 같긴 하다만.
덧붙여 드뷔시가 바그너에게 가지는 반감도 흥미롭다. 드뷔시가 싫어한 건 독일인 바그너일까, 작곡가 바그너일까. 드뷔시 뿐 아니라 당시 파리의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독일에 적대적이었던 걸 보면 그냥 독일이 싫었던 걸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동시대에 작곡가로 이름을 떨치던 인물들이라 사변적인 호기심이 생긴다.
기억과 감각은 하나의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기 때문에 프루스트의 글은 드뷔시의 음악과 마찬가지로 인내심을 요구한다. - p.342
'의식의 흐름'의 난해함을 잘 표현한 문장.
'인내심'에 강렬한 붉은색 밑줄을 긋고 싶다. 드뷔시와 프루스트를 듣고 읽는 내 기분이 딱 이렇다.
'케이크워크'로 대변되는 흑인, '우키요에'로 대변되는 오리엔탈리즘, 물의 정령으로 대변되는 여성수인(獸人) 세이렌으로 이어지는 책의 목차 혹은 편집 방향은 저자의 집필 의도가 잘 드러난다. 사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저자가 음악인이고, 역자 또한 음악인이라는 것이다. 내용을 들여다보면 곳곳이 전문적인데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역자가 우리말로 잘 옮겼다는 감탄이 솟는다. 이건 비음악인이며 일반인 독자로 느끼는 감상인데, 물론 카리야 테츠의 역작 <맛의 달인>을 읽는 기분이 없었다고는 못 하겠다.
이를 테면 드뷔시의 『전주곡』 제2권 2곡 '고엽' 19마디를 표현한 대목이 그렇다.
텍스트로는 상상이 안 가서 유툽에 접속해 드뷔시의 '고엽'을 들어보았다. 반복해서 들어보았으나 결국 텍스트를 이해하는데는 실패했다. 이상도 하지. 생선회 한 점을 입에 넣는 순간 입 안에서 용이 꼬리를 휘두르며 하늘로 승천한다는 묘사는 그리도 선명하더니만. 미각의 회화화는 이토록 실체적인데 선율의 회화화는 영 뜬구름 잡는 듯 오리무중이다. 아마도 음계를 그리지 못하는 비음악인의 한계인가라는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드뷔시가 음악계의 인상주의를 열었다는 평을 받는 이유는 확실하게 이해하겠더라. 별개로 혹시 누가 나한테 이 곡 '고엽'을 설명하라면 팻 매스니의 'Missouri Sky'를 인용할 것 같다. 수면곡으로 활용하면 좋겠더라 하면 너무 무식한 소리인가...;
한편, 이 장을 읽으면서 떠오른 옛 기억 하나.
졸업을 앞둔 마지막 학기에 서양화를 전공하는 동기 Y를 따라 서양화과 교양을 들은 적이 있는데 하마터면 졸업 못할 뻔했다. 수강신청 기간에 혼자 강의 듣기 싫다고 징징대던 복학생 Y가 같이 수업을 듣자고 우릴 꼬신 거다. '시험은 기말 한 번, 오픈북, 학점 추수 꿀교양'이라는 Y의 감언이설에 속아 남의 전공 교양 강의실에서 우리는 강의 내내 난누구 여긴 어디 맹하게 앉아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기말 시험 날. 수강생 중 유일한 타과생이던 우리 셋(나+군면제자 2)은 사전고지 없었던, 교수실로 불려가 별도로 시험을 보는 영광을 누렸다. 시험 문제는 하나, 오픈북, 논술형. 여기까지는 동기 말이 맞는데 제목도 기억 안 나는 두꺼운 책을 옆구리에 끼고 시험문제를 받아든 순간 테이블(책상이 아니다) 앞에 쪼르르 나란히 앉은 우리는 말을 잃고 서로 눈짓을 주고 받았다.
야, 이거 문제 뭐라는 거야? 내가 알겠냐. 우리 이제 어떡하냐. Y새끼 죽여버리겠어.
그림 그리는 Y한테나 교양이고 꿀이지 기업 회계장부를 들여다보며 공학용 계산기나 두드리던 우리한텐 외계어나 마찬가지였던 거다. 당연히 시험은 망쳤고 그날 오후 Y를 끌고 교수님을 찾아가 담판(이라고 쓰고 애원이라고 읽는)을 지었다. 결국 논문 수준에 준하는 리포트를 제출하고 B를 받긴 했는데. ...그럼 꿀 맞나? 꿀 맞네. Y 잘 사는지 모르겠다. 나름 천재 소리 듣던 동기였는데 잘 살고 있겠지.
짱구가 컴플렉스였던 드뷔시의 개인사에서 단연 눈에 띄는 건 여성편력. 그리고 딸을 향한 극진한 애정. 드뷔시는 아이들을 위한 창작과 활동에도 열성적이었다.
플레이보이와 딸바보라니. 뭐냐 형용모순 같은 이 위화감은. 나로선 도저히 알 수 없는 남자들의 애정관이란...
《르 리르》지의 표지 삽화인데 그림을 보고 경악했던 기분은 내용을 보자 오묘해진다. 캐서린 카우츠키는 이 삽화에 대해 이렇게 설명을 붙였다.
때로는 광기가 아침에 먹은 멜론보다는 사디즘으로 치닫기도 한다. 지로의 시 '달에 홀린 피에로'에 등장한 피에로는 다른 사람의 두개골에 구멍을 내어 파이프 담배를 피우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
드뷔시는 에드거 앨런 포가 쓴 근친상간과 파멸에 관한 섬뜩한 이야기 <어셔 가의 몰락>을 원작으로 한 오페라에서 핏빛으로 물든 보름달을 묘사한다. 여기 등장하는 달과 피, 광기, 그리고 밤은 불가분의 관계로 묘사되고, 달에 홀린 피에로는 연인과 살인자, 사랑받는 바보와 복수심에 찬 사형집행인의 경계에 불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다. pp.48-49
삽화 속 여자의 묘사가 엽기적이라면 엽기적이라 처음엔 삽화가의 악의인가 했다만 이어지는 다른 삽화들을 보니 당시 관행이 그러했던 것 같다. 이 페이지는 드뷔시의 '달' 연작에 부쳐진 내용. 드뷔시의 '달빛'과 '광기'는 언뜻 잘 연결되지 않지만 어쨌든 재미있는 해석이다.
아마도 당시 삽화는 인물을 묘사하는 방식에 관하여 일종의 합의가 있었던 게 아닐까 짐작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