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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23 bytes / 조회: 2,013 / 2021.06.28 21:43
[영상] 이창동 <버닝> (스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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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Burning, 2018)

감독 :이창동 ㅣ 출연 : 유아인, 전종서, 스티븐 연

 

2018년 개봉작이다. 왜 이제 봤을까. 앞구르기 하면서 봐도, 뒷구르기 하면서 봐도 딱 취향인데. 

영화가 끝난 후 가장 놀라웠던 건 <버닝> 이전에 본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초록물고기>가 유일하다는 거였다. 실은 <초록물고기>가 이창동의 영화라는 것도 잊고 있었다. 

 

작가주의 영화를 좋아한다. 감독이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를 자기만의 문법으로 견고하게 쌓아올린 미장센은 영화 외적으로도 긴 여운이 남는다. 여담이지만 딱히 좋아하지도 않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거의 다 챙겨본 까닭을 <버닝>을 보니 알겠더라. 개봉 당시에 <버닝>을 본 M이 '대본 없이 현장에서 그때그때 찍는다는 감독이 누구였냐'고 물었는데 헷갈릴만도 하다 했다. 영화 초반 종수와 해미가 술집에서 얘기를 나누는 장면은 홍상수의 날것과 닮은 데가 있다.

  

엔딩 크레딧까지 본 뒤 영화를 만든 사람들의 육성이 궁금해 검색했다. 개인 SNS는 걸렀는데 관객의 감상이 아니라 영화를 만든 사람의 생각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검색 결과는 제법 흥미로웠다.

 

(출처. 나무위키) 

이창동은 <버닝>이 시나리오 개발 단계에 있을 때 부산국제영화제 좌담회에서 자신의 차기작에 대해 "젊은이들이 요즘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이나 자기 삶에 대한 생각이 아마 이해할 수 없는 미스터리 같은 것이 아닐까, 그런 의도로 만들어진 영화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개봉 전후에는 키워드를 '청춘'과 '미스터리'로 놓고 영화를 소개하고 있으며, 해외 및 한국 언론들도 이 테마에 집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근원이 명확하지 않은 '분노'가 이 영화의 중심 키워드로 많이 얘기된다. 시나리오를 쓴 오정미 작가가 이 영화의 초고 제목을 '분노 프로젝트'라고 써놓았을 정도였고 이창동도 영화의 가장 출발은 현대인의 분노라고 얘기한다.

 

공동 각본을 쓴 오정미 각본가는 6월 14일에 열린 라이브톡에서, 텅 비어있지만 채울 수 없는 비닐하우스와 세련된 승용차를 불태우는 벌거벗은 몸이라는 두 가지 이미지는 영화의 가장 시작부터 있었다고 말했다. 소설 <헛간을 태우다>와 영화를 어떻게 연계했냐는 질문에, 소설의 등장인물이 말한 "아무 쓸모없는 헛간"이라는 표현에 화가 났고, 소설의 줄거리를 '진실은 있으나 아무도 모른다(다가갈 수 없다)'로 생각했는데, 그 진실에 다가가려고 하는 사람일수록 화가날 것이라 생각해 영화를 풀어나갔다고 한다.

 

감독과 각본가의 말을 요약하면 <버닝>은 '좌절하는 청춘의 분노'에 관한 이야기인데, 정작 내가 본 <버닝>은 두 사람이 제시한 키워드와 좀 어긋난다. 종수의 '분노'보단 오히려 '열등감'이 더 인상적이었는데 나는 해미와 벤을 대하는 종수의 감정의 기저가 분노보다는 열등감에 더 가깝다고 보았다. 물론 열등감이 분노로 발화될 수도 있지만, 사실 영화가 끝나고 궁금했던 유일한 대목이기도 한데, <버닝>을 얘기할 때 붕어똥처럼 따라나오는 '청춘의 분노'를 나는 딱히 느끼지 못했다. 내가 뭘 놓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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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수가 포크너를 좋아한다고 하자 포크너를 읽는 벤. (* 참고로 영화에 소품으로 등장하는 책은 실재하지 않는다)

사실 종수와 벤의 사이는 나쁘다고(or 나빴다고) 할 수는 없다. 자신의 얘기를 하는 것이 중요한 해미와 달리 벤은 종수에게 종수에 관하여 질문하는 인물이고, 종수 역시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내밀한 기억을 벤에게 털어놓는다. 또한 이런 종수의 태도가 벤의 얘기를 끌어내는 것인데 원래 청자가 성실하면 화자는 말이 많아지기 마련이다. 

 

종수와 벤은 '태우는 것(burnig)'을 매개로 일종의 '메타포'를 주고 받으며 교감을 나누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교감하는 배경에 해미가 없는 것이 흥미롭다. 즉슨 그들을 만나게 한 매개체는 해미지만 그들은 해미 없이 자신의 얘기를 하면서 교감한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들은 '친구'에 가까운 관계로 보이며 대개 친구에게 열등감은 느끼지만 분노를 느끼진 않는다는 거다.

 

윌리엄 포크너는 쉽게 읽히는 작가도 소설도 아니다. 재미있는 건, 위에서 얘기했듯 나는 영화 <버닝>에선 분노의 정서를 거의 느끼지 못했지만, 종수가 좋아하는 작가 포크너의 단편은 '분노'로 가득하다는 거. 포크너의 분노가 차안대(遮眼帶)를 씌운 경주마처럼 정점을 향해 거침없이 질주한다면 종수의 분노는 상대적으로 무기력하다. 무기력한 분노도 분노라고 한다면, 그래, 그럴 수도 있겠네.

 

종수가 '포크너를 좋아한다'고 했을 때 나는 종수가 어수룩하고 순진해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그의 내면은 냉소적이겠구나 했다. 도중에 팬터마임 수강생들의 모습이 스치듯 잠깐 등장하는데 이 장면과 종수/벤을 병치해서 들여다보면, 종수와 벤은 내면과 다른 가면을 쓴 인물이고 이는 벤의 '메타포' 발언과 이어진다. 재미있는 건 메타포가 소설가 지망생인 종수가 아니라 놀고 먹는 개츠비 벤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어쩌면 벤은 종수가 욕망하는 것들을 비추는 거울일 수도 있겠다 싶었던 설정이었다. 과잉해석을 무릅쓰고 라캉의 욕망 이론으로 종수와 벤을 해석하면 재미있는 얘기가 나올 수도 있겠다 했던 대목. 

 

각종 영화제에서 수상을 많이 한 덕에 다행히 제작진의 코멘터리를 들을 수 있는 인터뷰를 여기저기서 찾을 수 있었다. 그중 가장 많았던 '영화에 대해 설명해달라'는 질문에 감독은 영화를 '청춘, 분노, 미스테리'라는 세 개의 키워드로 비교적 투명하게 설명한다. 막상 직접 확인한 영화는, 런닝타임 내내 관객을 현혹하는 키워드를 여기저기에 뿌려놓았지만 - 해석을 열어놓는 방식, 감독이 그렇다고 한다면 그런 것이겠다. 이쯤되면 감독의 의도와 비의도가 합이 잘 맞았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우물의 여부라던가, 비닐하우스 방화라던가, 고양이의 실체라던가, 해미는 어떻게 되었을까 라던가. 감독으로선 굉장한 행운인데 백인백색의 감상이 가능한 영화다.

 

그럼에도 하고 싶은 말은, 영화를 구성하는 이야기와 소품과 인물들 같은 요소를 대상화하고 해석에 지나치게 빠져들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숲은 사라지고 나무만 남는다는 거다. 그닥 바람직한 감상 태도는 아니다. 재구성되지 못하는 해체는 의미 없는 부스러기에 불과하므로.

 

그러므로 가능하면 해석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그럼에도 순전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해석을 덧붙이고 싶은 부분이 있는데 바로 엔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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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수수께끼 같아서 소설을 쓰는 게 어렵다던 종수는 두 개의 사건을 겪고 있다. 하나는 사라진 해미이고 다른 하나는 아버지의 재판이다. 종수는 해미의 행방을 찾기 위해 벤을 미행하고, 아버지의 집행유예를 위해 동네에 탄원서를 돌린다. 이 두 사건은 비슷한 시기에 종결되는데 이후 이어지는 장면은 남산 타워가 보이는 해미의 자취방 창 앞에서 노트북을 두드리는 종수의 모습이다. 

 

나는 이 장면을 영화의 엔딩으로 봤는데 영화의 공식이랄지 문법이랄지 딱 교과서적인 엔딩 연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후 엔딩 크레딧 대신 장면이 이어진다. 흥미로운 건 그때까지 종수가 화자이던 화면이 벤으로 옮겨간 것이다. 일종의 시점 전환인데 화면은 자신의 집 욕실에서 콘택트렌즈를 착용하는 벤, 여자친구에게 화장을 해주는 벤, 그리고 종수를 만나는 벤으로 동선이 이동한다.

 

그래서 나는 예의 장면 - 종수가 노트북을 두드리는 장면에서 사실상 영화는 엔딩을 맺었고 이후 이어지는 장면은 종수가 집필하는 소설이 아닌가, 해석했다. 감독이 의도적으로 뿌려놓은 떡밥들. 이를테면 해미의 고양이라던가, 우물이라던가, 비닐하우스라던가, 해미의 번호로 걸려온 정체불명의 통화 같은 것들은 감독이 언급한 '미스테리'를 수식하는 형용사이며, 이들 형용사는 감독이 언급했던 '청춘과 분노'를 수식하는 맥거핀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다.

 

정리하면, 

전날 종수에게 모진 소리를 듣고 화가난 해미는 죽는 건 무서우니까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냥 사라지고 싶다던 자신의 말처럼 어디론가 훌쩍 떠났고 종수의 열등감은 실연의 원인을 벤의 탓으로 돌리며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의 수수께끼를 소설로 썼다ㅡ 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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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 제작 비하인드를 보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영화화하는 NHK의 프로젝트로 NHK가 이창동 감독에게 제안했고 제작이 이루어졌다는 배경이 있다. 

 

나는 하루키의 단편 「헛간을 태우다」를 『지금은 없는 공주를 위하여』에 수록된 판형으로 읽었는데 이 책은 절판되었고, 지금은 단편집 『반딧불이』에서 읽을 수 있다.

 

이창동 감독은 하루키의 단편 말고도 말고도 포크너의 단편 「헛간 타오르다」도 대본을 쓸 때 참고했다고 했다. 

내가 읽은 포크너의 단편은 현대문학 『윌리엄 포크너」에 수록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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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외_

무라카미 하루키 「헛간을 태우다」

vs

윌리엄 포크너  「헛간 타오르다 Barn Burning」

 

- 영화는 하루키의 단편 <헛간을 태우다>를 대본으로 삼았다. 소설 속 대사와 상황 대부분을 그대로 영상으로 옮겼다. 캐릭터 설정과 결말 정도가 다른데, 일단 소설 속 종수는 30대의 유부남이며 (등단한)소설가다. 그리고 영화에선 종수가 벤에게 해미의 행방을 묻지만 소설에선 벤이 종수에게 해미의 행방을 묻는다.

 

- 영화는 플롯 대부분을 하루키의 소설에서 가져왔지만 아버지가 재판 받는 장면은 포크너의 단편에서 가지고 왔다. 그러니까 영화 <버닝>은 하루키의 소설에서 '미스테리'를, 포크너의 소설에서 '분노'를 차용했다고 볼 수 있다.

 

- 나는 영화를 보면서 '분노'를 거의 느끼지 못했다고 했는데 영화에서 '분노'가 느껴졌던 유일한 인물은 종수의 아버지였다. 분노조절장애를 지닌 아버지는 공무원에게 폭행을 휘두르고 재판을 받고 있지만 감형을 위해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분노'는 포크너의 단편에서 더욱 명징하게 서술된다.

 

- 원래 원작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보는 순서를 선호하는데 얼마전에 유튭에서 '영화 → 원작(소설)' 순서를 선호한다는 이동진 평론가의 영상을 보고, 또 그 이유가 설득력이 있어서 이번에 순서를 바꿔봤다. 그리고 후회했다. 영화적 해석(=감독의 시나리오)이 선행하니 원작 소설의 플롯에 몰입하는 것이 어렵고 그리하여 작가의 의도에 접근하는 것도 어려웠다. 원작은 1차 창작, 영화는 2차 창작. 잊지 말자.

 

- 하루키의 단편과 포크너의 단편은 둘 다 30여 페이지인데 단편 두 개를 연이어 읽은 기분은 좀 극단적이다. 하루키는 가벼운 소프오페라 한 편을 본 기분이라면 포크너의 단편은 보고 싶지 않은 이웃집의 폭력을 억지로 1열 직관한 기분. 단적으로 포크너의 문장은 읽는 동안, 그리고 읽고 난 후 멘탈이 부스러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나마 포크너가 살살 봐줬구나 싶은 게 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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