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홍진 <곡성> (결말 스포) (+07.16) >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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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93 bytes / 조회: 2,280 / 2021.07.05 01:07
[영상] 나홍진 <곡성> (결말 스포)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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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2016)

감독: 나홍진 ㅣ 출연: 곽도원, 황정민, 천우희

 

 


<곡성>으로 들어가기 전에...

 

공포 영화는 관객의 공포를 자극하기 위해 음향과 시각 효과를 동원하는데 그러다 보니 필연적으로 고어(gore), 스플래터(splatter), 슬래셔(slasher)가 등장한다. 내가 공포물을 못 보는 건 바로 이런 장르적 표현(촬영) 방식 때문인데, 나는 시각적/ 청각적 자극에 많이 예민한 편이라 단적으로 스크린 안에서 역겨운 장면이 나오면 헛구역질을 하고, 등장인물이 타격이라도 당하면 마치 내가 맞은 것처럼 환통 비슷한 걸 느끼며 움찔하는 것이다. 이런 실정이니 내가 공포물을 볼 수 있겠는가. 각설하고. 

 

공포물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화면 가득 핏빛이 낭자하게 썰고 베는 전통적인 방식의 공포물과 페이크 다큐(모큐멘터리Mockumentary)가 그것으로 전자는 오감의 공포를 부추긴다면 페이크 다큐는 심리적 공포를 자극한다. 공포물을 거의 안 보는 내가 순위를 매기기엔 좀 민망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본 공포물 중 가장 무서웠던 영화를 꼽자면 저예산 페이크다큐로 이 장르 최초 흥행작인 <블레어 위치>다. 엔딩까지 별 생각 없이 잘 봤는데 이튿날 뒤늦게 공포가 찾아왔다. 그리고 영화가 남긴 심리적인 공포에서 벗어나는데 만 3년 정도 걸렸다. 그 뒤론 페이크다큐도 거의 안 보게 됐다.

 

이런 배경 탓에 나는 공포물 전문 감독은 '변태'라고 정의한다. 나쁜 의미는 아니다. 참고로 '공포'는 아니지만 '고어'라는 점에서 내 기준, 이 장르 대표적인 '변태'는 박찬욱 감독이다.

 

 

 

공포 영화를 대하는 자세


 

위에 썰을 풀었듯이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공포물을 아예 안 보는데 개봉 당시부터 입소문 자자한 <곡성>이 무척 궁금한 거다. 

보고 싶은데. 볼 수 있을까. 그래, 보자. 단, 반드시.꼭. 환한 대낮에 보자. 

영화를 보기 전까지 M에게 때마다 물었다. 개봉이 2016년이니 몇 년 동안 같은 질문을 반복한 것인데 다행히 M이 기억을 못해서 성질 내지 않고 매번 성실하게 대답을 해주었다. 그리고 늘 똑같았던 대답은 '별로'. 문제는 M은 공포영화를 보면서 공포를 안 느끼는 부류라는 거다. 어느날 '공포 영화는 어떻게 보면 안 무섭냐' 팁을 달라고 하니 '감독 입장에서 보면 안 무섭다'고 한다. 그리하여 감독의 정신으로 무장하고 공포영화 앞에 앉았는데 개뿔. 감독입장이고 뭐고 심장마비 걸릴 뻔했다. 

 

 

 

<곡성> 


 

늘 봐야지 벼르던 <곡성>을 드디어 봤다. 나홍진 감독이 원안을 맡고 제작에 참여한 오컬트 영화 <랑종>이 태국에서 개봉하면서 여기저기서 <곡성> 얘기가 들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에 더 미룰 수 없었다. 이러다 스포일러 당하겠다 싶어 부랴부랴 본 <곡성>. 결론부터 말하면 기대에 많이 못미쳤다. 가장 중요한 공포는, 의외로 안 무서웠고 의외로 싱거웠다. 내가 안 무서우면 안 무서운 거다. 과장이 아니라 나는 공포의 기준이 될 자격이 충분히 있다. (이상한 데서 자부심)

 

'아는 만큼 보이는 영화' 라는 평도 있던데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맞는 말도 아니다. 일단 시퀀스에 뿌려놓은 키워드가 의심의 여지 없이 매우 선명하다. 무속, 샤머니즘, 기독교, 엑소시즘 등. 또한 이 키워드 각자가 목소리를 내는 지점도 매우 뚜렷하다. 떠서 먹여주므로 딱히 해석이 필요하지 않다. 그런데 감독이 상냥하달지 혹은 게으르달지. 이들 소재들이 각 시퀀스에서 플롯을 발생시키는 건 맞지만 그 플롯으로 얼개를 짜고 그 얼개 위에서 이야기를 확장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무슨 이유인지 브레이크를 밟는다. 영화가 공포스럽지 않았던 건 진짜 공포가 완성되기 직전 다음 한 보를 생략해버리기 때문이다. 이 한 보를 두고 다양한 해석이 쏟아지는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시간낭비, 소모적이라고 본다. 정작 감독 자신도 대답을 못 할 것이기 때문. 밑에서 다시 얘기하겠지만 이 영화의 정체성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뷔페식 만찬'이기 때문이다.

 

감독이 하고 싶은 얘기를 다 못하고 몸을 사렸다는 의심이 드는 지점이 몇 군데 있는데 한 예로 효진이와 외지인의 관계. 외지인은 여성에게 매우 왜곡되고 혐오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여성 피해자는 세 명인데 한 명은 외지인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소문이 있고, 다른 한 명은 술집 작부다. 나머지 한 명이 효진인데 종구가 효진과 외지인에게 어떻게 만났는가, 무슨 짓을 했는가 묻지만 종구는 대답을 듣지 못한다. 아마 박찬욱 감독이라면 여기서 장면을 더 전개했을 것 같지만 나홍진은 성적 함의를 실컷 던져놓고선 얘기를 완결짓지 않고 그대로 생략한다. 아직 변태력이 덜 연성되신 듯. 이제 겨우 영화 세 편을 찍은 감독으로선 임권택이나 박찬욱처럼 'my business!' 달려나가기엔 부담이 컸을까.

 

덧붙이면 이번에 태국에서 개봉하는 <랑종>은 아마 나홍진 감독이 <곡성>에서 미완으로 남긴 변태력을 보다 본격적으로 펼치지 않았을까, 기대된다. 나홍진은 여러차례 오컬트를 향한 애정을 피력했고 그 결실이 <랑종>이 아닐까 짐작해 보는 것이다. 아마 <랑종>의 성공 여부가 향후 나홍진식 오컬트를 완성하는 교두보가 되지 않을까.

 

 

 

반전


 

나는 주변이 다 아는 눈치가 박치인 인간이라 내가 눈치채면 다 눈치챘다고 보면 된다. 한마디로 나는 공포의 기준이면서 눈치의 기준인데(요상한 데서 자부심을 느낌), 일광과 외지인이 한패거리구나 눈치챈 건 일광이 바지를 깠을 때였다. 일광과 외지인이 입은 '훈도시'는 우연이 아니라 감독이 그냥 떠먹으라고 차려준 밥상이다. 그들은 훈도시를 함께 입는 경제공동체였던 것이다. 

 

영화가 끝난 후 M에게 '이후의 이야기를 모른다고 가정하고 네가 종구라면 무명과 일광 중 누구의 말을 믿겠냐?' 물으니 M이 '무명'이라고 대답했다. 왜냐고 이유를 물으니 '여자니까'라고. (아, 홧병) 

 

감독이 일광과 외지인의 행각과 관련하여 던져놓은 떡밥이 굉장히 친절한데 영화 초반 사람이 죽어나갈 때 이웃사람들이 모여서 '굿을 하고 나서 사달이 났다'고 수군댄다. 종구의 장모가 종구에게 용한 점쟁이가 있다더라고 얘기를 꺼낼 때도 '기다렸다는 듯이'라는 부사가 떠오르는 타이밍이었고. 한마디로 일광과 외지인은 병 주고 약 주는 전형적인 약장수 패거리인 것. 물론 일광이 굿을 하며 살을 날린 상대는 효진이다. 일광이 굿판을 벌일 때 외지인이 굿을 하는 장면을 교차해서 보여줌으로써 창과 방패의 대결인양 연출했는데 당연히 트릭이다. 외지인은 아마도 외곽에서 일광을 돕는 조력굿을 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가 보여주지 않은 이야기를 추측해보자면, 일광은 외지인을 만나기 전엔 그저 그런 점쟁이었을 거다. 그러다 외지인의 조력으로 살을 날리는 굿판을 열 정도로 유능한 점쟁이가 되었고. 일광은 그것이 자신의 능력인 줄 알고 있지만 진실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외지인이 산 사람인 일광을 꼭두각시처럼 부리며 인간 세상을 활보하는 것이다. 외지인이 악마의 형상을 유일하게 드러낸 건 가톨릭 부제 양이삼 앞에서인데 만약 외지인이 악마가 맞다면 여러 정황으로 보아 일광은 외지인의 정체를 모르는 것으로 보인다. 

 

 

 

뷔페식 만찬


 

삭제된 엔딩 신까지 본 감상은 딱 뷔페식 만찬. 양식/중식/한식/일식 등등 여러 종류의 음식을 먹었지만 누가 뭐 먹었냐 물으면 '응, 뷔페'라고 대답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오컬트를 좋아하는 감독이 본인 취향대로 온갖 장르적인 요소들을 때려넣었지만 장르와 이야기가 유기적으로 결합하지 못해 결국 남은 건 미완의 찜찜함이다. 재료는 보이는데 요리는 보이지 않는 형국. 평론가들 사이에 평이 극과 극으로 나뉘었던 것 같은데 51:49 비율로 나는 혹평을 준 평론가들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다만 감독의 실험정신은 응원한다. 

 

나홍진의 영화는 <추격자>와 <곡성> 두 편을 봤는데 고작 두 편으로 진단하기에는 섣부른 감이 있지만 나홍진이 잘 하는 건 스릴러라는 생각. <추격자>는 잘 하는 걸 찍은 거고, <곡성>은 좋아하는 걸 찍은 거고. 영화팬으로선 감독이 잘 하는 걸 찍어주면 좋겠지만 장르에 대한 감독의 애정을 봤을 때 아마 다음 영화도 오컬트이지 않을까 싶다. 그러고보니 <랑종>을 나홍진의 차기작으로 봐야 하나?

 

마지막으로.

기독교에서 가지고 온 설정 몇 개는 모두 다 어색하고 억지스러웠다. 굳이 기독교 세계관을 끼워넣으려니 희대의 망대사 '와따시와 아쿠마다'가 나오는 것이다.

 

 

 

믿음과 의심


 

<곡성>을 지배하는 주제는 '믿음과 의심'이다. '가족 몰살'이라는 패를 놓고 종구는 의심과 믿음의 기로에 선다. 그리고 종구는 의심을 선택한다. 기왕에 기독교 세계관이 나왔으니 마태복음의 한 장면을 인용해보자면, 물 위를 걷는 예수를 보고 예수를 쫓아 물 위를 걷던 베드로가 의심하는 순간 물 속으로 빠진다. 믿는 베드로는 물 위를 걸을 수 있으나 의심하는 베드로는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이다. 그에 베드로를 건져올린 예수가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고 탄식한다.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관하여 베드로에서 차용한 일화가 맞다고 감독이 실토했으니만큼 믿지 못하여 물에 빠진 베드로와 의심을 선택한 종구의 비극과 비교해도 무리가 없겠다. 

 

사실 (기독교)신과 인간의 관계는 매우 심플하다. 신을 믿지 못하는 인간에게 배신감을 느낀 신이 인간을 벌하는 배신과 용서의 반복인 것인데 실은 의심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원죄인지도 모른다. 뱀이 하와를 꼬드길 때 했던 것도 고작 신을 의심하도록 부추기는 몇 마디였다. '네가 똑똑해질까봐 신이 너에게 과일을 못 먹게 하는 거야'. 이아고가 장군 오셀로를 엿먹인 것도 의심을 부추기는 한 마디면 되었다. 그러고보면 인간의 세 치 혓바닥이야말로 얼마나 치명적이고 악마적인 무기인가.

 

아쉬운 건 감독이 장르와 소재에 들인 에너지의 절반이라도 '믿음과 의심'이라는 레토릭에 집중했다면 정말 괜찮은 오컬트 한 편이 탄생했을 텐데 하는 거다.

 

 

나의 <곡성> 별점은 ★★☆☆☆ 

 

 

 

대사


 

한국영화사는 잊을만 하면 명대사가 등장하는데 <곡성>에서 일광이 영화사에 남을 명대사를 뱉는다.

  

자네는 낚시할적에 뭐가 걸릴건지 알고 미끼를 던지는가? 그놈은 미끼를 던진것이여, 자네 딸은 그 미끼를 확 물어분것이고.
 

 



후일담 - 종구의 선택 (+07/19)


 

효진이를 찾으러 다니던 종구는 무명과 맞닥뜨리는데 이때 무명은 닭이 세 번 울기 전까지 집에 들어가지 말라고 종구를 붙잡는다. 이유를 묻는 종구에게 그래야 네 가족이 다 살 것이라고 대답했고. 당연한 얘기지만 그러니 나는 종구가 무명을 믿고 닭이 세 번 울고 나서 집에 돌아갔으면 참사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다들(리뷰어+평론가) 입을 모아 종구의 선택과 상관없이 결과는 똑같았을 거라고 하는 거다. 하물며 한 기자는 시사회 리뷰에 '무명이 너(종구)는 살 것이다'고 하였으며 종구의 선택과 상관없이 종구의 가족이 참변을 당하는 결과는 바뀌지 않았을 거라고 썼다. 덧붙여 감독도 바뀌는 건 없었을 거라고 했다고. 

 

이제 혼란이 오기 시작한다. 내가 영화를 잘못 봤나. 

그리하여 영화를 다시 봤다. 

 

결론부터 말하면 '너(종구)는 살 것'이라는 대사는 영화에 없다. 

무명의 정확한 대사는 '네 가족을 살리고 싶으면 닭이 세 번 울기 전까지 집에 가지 말라'다. 그리고 '덫을 쳐놓았으니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왜놈 귀신이 덫에 걸려들 것이고 그럼 (이 난장도)다 끝날 것'이라고도 말한다. 무명의 대사는 행간을 더듬을 필요도 없이 매우 또렷하고 분명하다. 결과는 누구나 알듯이 닭이 두 번 울었을 때 결국 종구는 못 참고 집안으로 뛰어들어갔고 종구가 대문을 통과하는 순간 결계처럼 걸려있던 꽃이 시든다. 이 꽃은 영화 초반 똑같은 참변을 당한 일가족의 집에도 걸려있던 것이다. 같은 과정이 반복해서 일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어 종구가 발견하는 건 낭자한 피로 도배된 집안이다. 닭이 세 번 울고 종구가 집에 돌아갔다면 종구가 발견한 건 아마도 한잠에 빠진 삼대 모녀였거나, 아니면 한바탕 악몽을 꾼 종구가 고함을 지르며 깨어났을 거라고, 결과는 달라졌을 거라고 내가 생각한 이유다.

 

기자나 리뷰어, 평론가들이야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는 감독의 워딩을 반복한 것이라고 한다지만, 무명의 대사를 통해 직접적으로 암시를 하고서도 종구의 선택은 결과를 바꾸지 못한다고 말한 감독의 코멘터리는 관객을 기만했다고 볼 수밖에.

 

 

 

별점 변경


 

별점을 ★★★☆☆로 변경한다.

얼마 전에 M이 내게 말했다. "이제 곡성 얘기는 그만 하지."

그 말에 불현듯 내가 한동안 '곡성' 얘기만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며칠동안 계속해서 '무엇'에 관하여 말을 했다는 건 며칠동안 계속 '무엇'을 생각했다는 거다. 성공의 사례에서 배우는 것과 실패의 사례에서 배우는 것의 가치는 대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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