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세르주 카콩 『로맹가리와 진 세버그의 숨가쁜 사랑』 > Review

본문 바로가기
Login
NancHolic.com 감나무가 있는 집 Alice's Casket 비밀의 화원 방명록
Review
-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17857 bytes / 조회: 876 / 2022.12.12 01:37
[도서] 폴 세르주 카콩 『로맹가리와 진 세버그의 숨가쁜 사랑』


20221213130400_eca180b59f4dd54c792ef9d52db75b6a_6kc2.jpg

 

 1961.

영화 <콩고 비보> 촬영을 하러 떠나기 직전 로마에서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를 둘러싼 온갖 루머와 음모론을 모두 지우고 확인된 사실만 훑어도 두 사람의 인연은 만남부터 사망까지 한 편의 극영화를 본 기분이 든다. 두 사람은 의미 그대로 '영화처럼 살다가' 갔다.

 

소설가 로맹 가리와 배우 진 세버그로만 인지했던 두 사람이 부부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접하고 무척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언제 한번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에 대해 들여다봐야겠다 했는데 계속 미루다 이번에 두 사람 얘기를 다룬 『숨가쁜 사랑』을 도서관에서 대출한 걸 시작으로 영화 <새벽의 약속><세버그>를 연이어 보고 기왕 스타트를 끊은 김에 연말엔 로맹 가리의 소설을 몇 권 읽어볼 계획.

 

 

20221217013505_67b9df552c5b6c112a0a96859af59854_6ydh.jpg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숨가쁜 사랑

폴 세르주 카콩(지은이), 백석희 (옮김) ㅣ 마음산책

 

 

 

장바구니에 꽤 오래 머물렀던 이 책이 결국 구매로 이어지지 못한 가장 큰 장애물은 제목이었다. 게다가 미리읽기로 확인한 첫 페이지는 아, 이건 너무 신파란 말이지. 책은 가리와 세버그가 화학적 반응을 일으키며 불꽃을 튀기는 첫 만남을 묘사하면서 시작하는데 이건 어떻게 읽어도 딱 '이수일과 심순애'를 찰지게 소환하는 변사의 뉘앙스가 아닌가.

 

그녀는 관습을 따르고 싶었고, 그래서 얼마 전에 결혼을 했다. 오늘 저녁, 그녀는 약간은 내키지 않지만 남편을 따라 관례적인 저녁 식사에 참석했다. 그런데 그 남자가 거실로 들어서는 순간, 그녀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오래전부터 어두운 마음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이 만남을 두려워하면서도 한편 그것에 대비해왔다. 처음에 그녀를 엄습했던 두려움의 감정은 곧 도전 의식으로 바뀌었다. 등을 벽에 기댄 채 그녀는 자기 목소리에 억양이 실리면서 내뱉는 말에 마법이 걸리고, 몸으로 말하는 동작을 팔다리가 그리는 걸 느끼며 여배우의 아찔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 남자는 어딘가 비현실적이면서 지독히도 진실하고, 강하면서 자유로운 무언가를 집약하고 있었다. 불현듯 위반을 저지르고 싶은 취기에 사로잡힌 그녀는 그의 품에 몸을 던지고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날 데려가 줘요.

그는 마흔다섯 살로 황금기이기를 바라는 나이, 아직 욕구로 들끓는 과거와 인내로 가득 찬 현재 사이의 노란선 위에 선 나이였다. 그는 시간에 시간을 내주는 그런 부류가 아니었다. 그는 흔히들 원숙하다고 말하는 이 나이가 경험과 시련을 갑옷처럼 두른 척박한 나이일 뿐이며, 경험과 시련은 그저 질서와 이성을 상기시킬 뿐이라는 걸 잘 알았다.

 

-p.21

 

 

책을 덮고 원문 제목을 확인했다. 프랑스어 원문 'Un Amour a Bout de Souffle'는 '숨막히는 사랑'이다. 

'숨가쁜'이 '숨막히는'이 되었으나 역자는 죄가 없다. 그러니 남은 건 하나. 나는 프랑스어를 모르니 이제 변사의 노래 같은 문장이 원저자의 것인지 역자의 것인지 확인할 길은 요원하므로 닥치고 그냥 읽자.

 

참고로,

원문 제목 'Souffle'는 세버그를 스타로 만들어준 대표작 <네 멋대로 해라>의 원제이기도 하다. 영어권에선 'Breathless'로 번역되었고, 우리나라는 일본의 제목을 그대로 가져와서 <네 멋대로 해라>가 되었다고 한다.


 

이 책의 미덕은 누구 한 사람에게 치우치지 않고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인생 서사에 지면을 공평하게 분배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로맹 가리는 그가 쓴 소설을 중심으로, 진 세버그는 필모를 중심으로. 영리한 선택이다.

덕분에 영영 모르고 지나갔을지도 모를 깨달음이 하나 있었는데 『새벽의 약속』 『하늘의 뿌리』를 다시 읽어야겠다는 반성이다. 몇 년 전 책이 출간됐을 때 도서관에서 대출했으나 지루하고 심심해서 몇 페이지 못 읽고 반납했는데 이제 보니 『하늘의 뿌리』는 코끼리를 살육하는 아프리카 현장을 고발하고 생태를 보호하자는 내용이 주제였다. 동명의 영화를 보며 생각한거지만 작가의 자전적 소설인 『새벽의 약속』을 먼저 펼쳤더라면 어쩌면 완독하고 반납했을지도 모르겠다.

 

작가 외에도 여러 직업을 가졌던 로맹 가리(혹은 에밀 아자르)는 워낙 유명인사여서 소설을 읽기 전부터 낯익은 인사였지만 미국 아이오와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누벨바그 시대를 여는 기차에 올라탔던 진 세버그는 트뤼포를 통해 알게 된 배우였다.

 

언어의 특성 탓인가 프랑스 소설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영화도 그닥 취향은 아니다보니 굳이 찾아서 즐기지는 않는데 누벨바그 영화는 좋아한다. 누벨바그 영화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단연 트뤼포인데 지금보다 더더더 백수였던 시절 작가주의 영화를 몰아서 보던 시기에 <쥴 앤 짐(Jules et Jim)>을 보고 단숨에 빠졌다. 영화에 대한 호감은 당연하지만 누벨바그로 이어졌고. 취향 어디 안 간다고 내가 카뮈를 좋아하는 건 우연이 아니었던 거다.

 

진 세버그는 트뤼포를 쫓다 고다르와 함께 스치듯 접한 이름이다. 진 세버그, 장 폴 벨몽도 주연의 <네 멋대로 해라>는 트뤼포가 각본을 쓰고 장 뤽 고다르가 연출했다. 

 

책에 <네 멋대로 해라> 관련 내용이 잠깐 등장하는데 읽으면서 그 분위기에 나도 덩달아 신났던 대목이다.


영화의 나이가 그 작가들의 나이라는 건 사실이다. 왜냐하면 시나리오 작가인 프랑수아 트뤼포는 겨우 스물일곱 살이었고, 감독인 장 뤽 고다르는 스물아홉 살이었기 때문이다(중략…).

반세기가 흘러 헐리우드에서 장 폴 벨몽도는 자신이 이 영화를 어떤 무심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는지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네 멋대로 해라> 이전에는 주로 작은 영화들을 찍었고, 작은 역할들을 맡았습니다. 어느 날 축구를 하고 있는데 고다르가 절 찾아와서 영화를 같이 찍지 않겠느냐고 묻더군요. 저는 좋다고 했죠. 그는 먼저 단편영화 《샤를로트와 쥘>, 1958)을 하나 만들고 나서 나중에 큰 영화를 만들겠다고 하더군요. 촬영 준비를 위해 8월 15일 샹젤리제에서 고다르가 저를 전화 부스에 들어가게 했죠. 전 물었습니다. '무슨 말을 하지?' 그가 대답하더군요. '네 마음대로.' 그래서 아무 말이나 했죠." 그리고 이 영화의 상대 여배우에 대해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진 세버그는 매력적이고 아주 재미난 여배우였습니다. 감독이 요구하는 건 모두 했죠. 그녀는 오토 프레밍거와 영화를 막 찍고 난 참이었는데 전혀 성공적이지 못했죠. 우리는 아주 즐겁게 작업했습니다. 왜냐하면 영화가 절대 개봉되지 않을 거라고들 말했거든요." 따라서 이 작은 세계에는 젊음과 신선함이 있었고, 경험과 학식 때문에 종종 근엄함에 덮여버리는 날카로움이 살아 있었다.

 

pp.94, 95

 

몇 줄 안 되는 인터뷰에 불과한데도 그날의 현장, 그날의 활기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20221213185651_eca180b59f4dd54c792ef9d52db75b6a_49f1.jpg

 

리투아니아 출신으로 프랑스에 정착해 프랑스인으로 살았던 로맹 가리와 미국 아이오와 출신이지만 생의 중요한 시기를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진 세버그는 둘 다 평생 이방인으로 살았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이런 공통점이 매파 노릇을 한 것 같지는 않다. 남녀 사이에 벌어지는 사건은 우아하고 지적인 철학과 상관 없이 대개 즉물적인 욕구에 의해 발현되기 마련이고 게다가 이 두 사람은 그쪽으로 유독 자유로운 영혼들이라...

 

좀 의외였던 건 로맹 가리인데, 로맹 가리는 첫 번째 결혼은 프로포즈 단계에서부터 '당신한테만 충실하지는 못 할 거다(바람 필 거다)' 못 박고 시작했던 것과 달리 두 번째 결혼은 '비교적' 아내- 진 세버그에게 충실했다. 강조하지만 '비교적'이다. 

 

진 세버그는 흑인인권운동에 관심이 많았고 흑인 활동가들과 교류하며 물심양면 도왔는데 이 일로 두 번째 아이를 임신한 상태로 온갖 루머에 시달리다 결국 조산한 아이를 잃는다. 이 시기에 가장 악랄했던 루머는 세버그가 임신한 아이가 흑인이라는 세간의 의심이었다. 당시 흑인인권운동에 관심을 보인 여배우들은 대개 진 세버그와 유사한 공격을 받았는데 그 내용이 매우 치졸하고 악랄하다. 그중에서도 진 세버그가 유독 심하게 괴롭힘을 당했던 건 아마 로맹 가리도 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이들 커플은 워낙 유명세를 몰고 다녔으니 흑인인권운동을 부정적으로 다루었던 미 정부는 두 부부의 영향력이 불편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평소 여성운동의 방향성을 '여성중심주의'로 접근하는 걸 경계하는 편인데 진 세버그는 여성주의 관점으로 봐야 할  필요가 있다. 이유는 첫째, 당시 여배우를 타겟으로 광범위하게 배포되었던(배후가 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는 조직적이고 일사분란하게 양산된) 루머 대부분이 '여성성에 수치심을 주는 것'에 집중되었고, 둘째는 전성기의 진 세버그에게 들어온 배역의 성격이 충격적일 정도로 스테레오타입- 획일적이기 때문이다. 정신쇠약에 걸린 여자, 자실하는 여자, 정신병원에 입소하는 여자, 남자들 세계에서 남자들 사이를 떠도는 팜프파탈 등등, 등등, 등등... '여배우'를 소비하는 대중과 업계의 폭력적인 요구가 비단 진 세버그에게만 국한된 건 아니었을 거다.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결혼 생활은 8년이었는데 이 시기의 두 사람을 보니 세버그에게 가리는 구원이었고, 가리에게 세버그는 시험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미 막을 내린 두 사람의 엔딩을 보면 가리는 결국 세버그를 구원하지 못했고, 세버그라는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로맹 가리는 이혼 후에도 보호자로, 친구로, 아이의 부모로 진 세버그의 곁을 지키지만 불행하게도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건 자신 뿐이다.

 

 

1979년 9월 8일, 여배우 진 세버그가 실종된 지 열흘 만에 자동차에서 죽은 채 발견되어 세상을 충격에 빠뜨렸다. 약물과다 복용으로 인한 자살로 결론이 났으나 의혹이 가시지 않는 죽음이었다. 이틀 후, 그녀의 전남편 로맹 가리는 기자회견을 열어 아내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FBI에 물었다. 그리고 1년 여 뒤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죽고 얼마 후, 베일에 가려져 있던 작가 에밀 아자르가 로맹 가리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세상은 또다시 충격에 휩싸였다.

 

-p240


 

세버그의 사망으로부터 1년 후 로맹 가리는 자신의 죽음 후 세상이 떠들어댈 것을 예상하고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겼다.

 

진 세버그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깨진 사랑 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른 데 가서 알아보시길.

  

로맹 가리는 왜 자신에게 방아쇠를 당겼을까. 

본인도 아닌 타인의 인생과 그 머릿속을 누가 어떻게 알겠는가만은, 다만 로맹 가리의 삶을 연대로 펼쳐놓고 쭉 훑다보면 매순간 정말 열심히 치열하게 살았던 흔적과 마주친다. 사랑도, 문학도, 정치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달렸던 로맹 가리는 어쩌면 자신이 지배했던 세상에서 자신이 이루어야 할 것은 모두 이루었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삶을 끝을 내는 것도 자신이어야 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줄곧 인생이 비뚤게 이끈 모든 사람들을 위한 말을 자신의 여러 책에 마련두었다.

 

"세상을 확 뒤짚어엎어 꺼져버리게 만들고 싶어."

 

-p.237

 

 

* 댓글을 읽거나 작성을 하려면 로그인을 해야 합니다.

Total 338건 1 페이지
Review 목록
번호 분류 제목 날짜
338 영상 페어플레이(2023) 24.03.10
337 도서 지구에 마지막으로 남은 시체ㅣ레이 브래드버리 24.03.06
336 도서 갈대 속의 영원ㅣ이레네 바예호 24.02.14
335 도서 문학이 필요한 시간ㅣ정여울 24.02.13
334 도서 서머ㅣ조강은 4 24.02.10
333 도서 조국의 시간ㅣ조국 24.01.21
332 도서 리어 왕ㅣ셰익스피어 23.12.28
331 도서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ㅣ비비언 고닉 23.12.21
330 북마크 LineageㅣTed Hughes 23.12.12
329 도서 또 못 버린 물건들ㅣ은희경 23.12.05
328 도서 저주토끼ㅣ정보라 23.12.02
327 도서 인생연구ㅣ정지돈 23.11.06
326 도서 그렇게 우리의 이름이 되는 것이라고ㅣ신유진 23.10.29
325 도서 몽 카페ㅣ신유진 23.10.27
324 북마크 Mon Caf´eㅣ신유진 2 23.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