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윤경 『영원한 유산』 > Review

본문 바로가기
Login
NancHolic.com 감나무가 있는 집 Alice's Casket 비밀의 화원 방명록
Review
-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14557 bytes / 조회: 1,018 / 2023.01.03 05:08
[도서] 심윤경 『영원한 유산』



20230105185436_e258df0f641fff3e7b20a1d77d92896a_t568.jpg


심윤경(저) ㅣ 문학동네

 

'영원'과 '유산'은 문학계에선 '사랑' 만큼이나 흔한 단어라 책을 서가에서 뽑을 때를 제외하곤 제목을 의식하지 않고 소설을 읽었다. 하지만 내용이 결말을 향하는 어느 지점에 이르면 제목 '영원한 유산'을 되새기는 순간이 오고, 소설의 주된 플롯을 끌고가는 두 인물의 반동 서사가 비로소 선명하게 보인다.

 

팩션인 『영원한 유산』을 끌고가는 인물은 크게 두 사람인데, 구한말 이완용과 맞먹었던 친일파 윤덕영의 막내딸 윤원섭과 독립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옥고를 치르고 사망한 이성준의 유복자 이해동이다. 그리고 사람은 아니지만 두 인물 못지 않게 플롯과 서사를 간직한 '덕수산장'이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윤덕영은 매국 행위로 이완용보다 재산이 더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동생 윤택영이 순종의 계비 순정효황후의 아버지다. 윤덕영은 조카 사위를 앞세워 온갖 주요 관직을 꿰차고 긁어모은 돈으로 프랑스에서 자재를 들여와 벽수산장을 짓는데 그같은 호사스러운 돈잔치를 벌일지언정 같이 친일부역하던 동생 윤택영이 빚에 쫓겨 도망간 베이징에서 객사에 이르도록 방치한 것을 보면 돈 앞에선 핏줄도 뭐도 없었던 인물로 보인다. 또한 무서운 거 없이 거침 없던 매국 행보를 볼 때 일본이 망할지언정 내 나라 독립은 안 되리라 믿었던 것 같다. 아니면 나라야 독립이 되든 병합이 되든 자신이랑은 아무 상관 없었거나. 부디 축생으로 환생했길.

 

가상인물이긴 하나,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이 윤덕영의 딸인만큼 그의 실제 자녀가 궁금해 관련 검색어로 구글링했는데 검색되는 게 없다. 그 위세에, 그 가산에 축첩이 당연하던 인물이고 보면 자녀가 없을 리는 없고 아마 당사자가 정보비공개를 한 듯 싶다.

 

소설은 윤덕영 사후 윤덕영의 딸 윤원섭이 가산이었던 '덕수산장'을 되찾고자 하는 과정과 그를 지켜보는 이해동의 시선을 쫓아간다. 이해동은 유복자로 태어나 4살 때 모친마저 여의고 고모에게 맡겨져 미(美)선교사에게 의탁해 자라며 영어를 익혔고, 그 인연으로 현재는 벽수산장을 본부로 쓰는 언커크(유엔 한국통일부흥위원회) 호주 대표 파견 인사 애커넌의 통역비서로 근무하고 있다.


20230105201718_e258df0f641fff3e7b20a1d77d92896a_msf9.jpg

 

20230105201210_e258df0f641fff3e7b20a1d77d92896a_fbup.jpg

 

소설의 주요 배경인 '덕수산장'. 

출처. (흑백)1926년 조선일보 / (컬러) 월간중앙  

 

 

 

소설은 1966년 새해 벽두에 서대문형무소 앞에서 시작한다. 이해동은 윤덕영 일가를 여전히 자작 나으리, 아가씨라고 부르는 팔묵 영감과 함께 윤덕영의 막내딸 윤원섭의 출소를 기다리고 있다. 이해동은 윤원섭이라는 인물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는데 해방 이후 행적이 분명치 않고 형무소에 수감된 이유도 친척을 상대로 한 횡령/문서위조/사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벽수산장을 빌미로 하는 윤원섭의 편지에 흥미를 느낀 상사 애커넌이 윤원섭을 만나고자 하여 윤원섭을 대면하러 온 참이다.

 

음. 내게만 국한된 얘기일 수도 있는데 사실 나는 '윤원섭'이라는 인물에 대해 일말의 기대를 가졌던 것 같다. 비록 아버지를 위시한 일가친척은 친일매국을 했을지언정 구한말에 태어나 해방과 동란을 겪은 윤원섭은 그들과 다른 행보, 다른 내적 질서를 가진 인물이 아닐까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반전은 없다. 작가는 이런 기대를 '견부견자(犬父犬子)'라는 아주 신랄한 방식으로 깨부수는데 윤원섭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친일매국노의 논리인 '내가 진짜 애국자다, 나는(우리 아버지는) 구국을 위해 친일을 했다'로 무장된 인물이다. 

 

 

"보퉁이를 내놓으라고? 그년이 장동 집을 날려먹은 생각을 하면 내가 울분이 나서 살 수가 없다! 어떻게 다시 나에게 손바닥을 들이밀 염치가 났다고 하디? 그년이 지분거리다 날린 재산이 어디 기와집 한두 채라고 하더냐? 내 아주 그년의 모가지를 분질러놓을 것이다! 아예 세상에 태어나지를 말았어야 할 그년을 내가!"

-pp.22-23

 

자세한 서술은 없지만 언니 윤성섭의 말을 빌면 거의 무일푼에 일가로부터도 내쳐진 윤원섭이 애커넌에게 접근하는 목적은 오로지 윤덕영의 유산인 '덕수산장'을 손에 넣는 것에 있다. 윤원섭의 이런 파렴치한 속내는 소설 말미 화재가 난 덕수산장으로 가는 길에 해동과 택시기사의 대화로 구체화된다.

 

 

"저기가 친일파가 지은 건물이오. 젊은 양반은 모르겠지만, 아주 유명한 작자였어. 지은 죄가 많아서 벼락을 맞은 거지. 진즉에 없어졌어야지."

"건물이 아깝지 않습니까. 건물이 친일을 한 것도 아니고."

"거, 친일파 후손들이 붙어살잖아!"

"무슨요. 적산이라 나라에서 몰수했지요. 진작부터 나라 재산입니다."

"그놈들이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공으로 내놓는 줄 알아? 저렇게 덩치 큰 것은 다 물밑으로 거래를 했어. 한 재산씩을 다 챙겼다고. 그러고도 끝이 아니오. 적산으로 내놓는 척만 하고, 나중에 보면 무슨 위원장이니 뭐니, 다 거기 들러붙어서 먹고 달아요. 내가 그런 걸 한두 번 본 게 아니야. 아주 썩어빠졌다고. 이번에 아주 싹 밀어버려야 해."

(pp.266-267)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소한 직후 손님으로 언커크 본부, 즉 덕수산장을 방문했던 윤원섭은 이 무렵 건물 일부를 보수, 복원한다는 명목으로 문화재복원디렉터라는 감투를 쓴 상황으로 막대한 공사비 예산을 손에 움켜쥘 예정이었다.

 

하지만 몰염치와 인면수심으로 무장한 윤원섭의 행적에 대한 분노가 잠깐이라면, 고모를 서울로 데려와 병원에 입원시키고도 사촌형에게 감사는커녕 '네 아버지는 독립운동가가 아니다'는 폭언을 듣고 진형과 거리를 배회하며 횡설수설하는 해동에게 느꼈던 연민은 책을 덮은 뒤에도 꽤 오래 남는다.

 

해동은 쉬지 않고 떠드는 제 주둥이를 틀어막아버리고 싶었다. 실은 말없이 걷고 있는 진형에게 묻고 싶었다. 내가 지금 도저히 아무 생각도 못하겠는데, 언커크에 계속 다녀야 할지, 월급이 많긴 하다, 서울 시내를 뒤져도 이만한 일자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윤원섭 그 여자는 정말이지, 부끄러움을 모르는 친일파가 가짜 경력으로 승승장구하는데, 나더러 애커넌씨가 아닌 그 여자 밑에서 일을 하라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라도 일을 계속해야 하는지. 그런데 왜 나만? 다른 사람들은 이런 고민 따위 조금도 하지 않고 잘사는데, 왜 나만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 것인지. 아버지에 이어서 나까지, 내 일도 아닌 것의 대가를 왜 내가, 나만, 치러야 하는 것인지.

마음 속에 태산처럼 높아져가는 그런 질문들을 진형에게 쏟아놓고 싶었다. 하지만 못나게 그런 소리를 할 수는 없어서 자꾸 바나나와 파인애플 이야기만 했다. 떠들어대다가 숨이 가빠 할딱거릴 지경이었다. 그래도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진형은 아까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이제 독립운동가 아버지는 없다. 고모도 곧 떠날지 모른다. 해동의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된다. 고모가 만나보라고 쪽지를 전해준 이 여자 말고는.고모가 장터에서 만난 진형을 왜 예쁘게 보았는지 이제는 알 것 같다.

(pp.234-235)

 

 

'해동의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된다. 고모가 만나보라고 쪽지를 전해준 이 여자 말고는'. 

이 문장은 제목 '영원한 유산'을 복기하게 만드는데, 이후 고모의 장례식장에 진형의 어머니가 5남매를 거느리고 나타나 아들들의 입을 통해 '해동의 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죽은 것이 맞다'고 증언함으로써 고모가 해동에게 남긴 '유산'을 독자에게 확인시킨다. 의지가지하던 고모마저 사망하고 이제 정말 고아가 된 해동에게 고모는 가족을 유산으로 남겼다. 

 

 

"이애가 성준이 아들인가?"

뒷걸음질쳐서 빈소를 나오는 해동의 눈앞에 자그마한 중년여자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반백의 머리에 쪽을 지고 목도리로 절반 가까이 가렸던 부숭한 얼굴을 드러내는 여자는 눈에 힘을 주고 다시 보아도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제가 성준이 아들 맞다고 어물어물 답하며 눈만 껌벅이는 새, 몇 발짝 뒤늦게 진형이 들어서 여자의 뒤편에 섰다.

"그냥 봐도 알겠다. 성준이랑 똑 닮았구나." 

진형이 아이를 다섯 낳고 과수원에서 삼십 년쯤 일을 하고 나면 그런 모습이 될 것을 깨닫고 해동은 화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내 문상은 진즉에 왔지만 누가 헛소리를 하고 다닌다고 해서 다시 왔네. 이봐, 독립운동을 하다가 잡혀간 사람은 자네 아버지 이성준이 맞네. 순사가 자네 집 뒤편의 돼지막에서 인쇄 기계와 종이를 찾아냈어. 그때 우리 큰애가 그걸 눈으로 똑똑히 보았네. 진만아, 네가 본 게 그거 맞지?"

"암뇨, 돼지막에서 인쇄기가 나오는 걸 내가 다 봤지요. 그걸로 성준이 아저씨가 잡혀가고."

진형의 뒤편에서 다시 한 사내가 불쑥 나섰다. 깡마른 진형과는 다르게 어디서도 주먹싸움으로 지지 않을 것처럼 어깨와 근골이 다부진 그는 자동차공업소에서 일을 하는 진형의 큰오라비 손진만이었다.

(pp.242-243)

 

반면 윤원섭이 그토록 탐을 내던 '덕수산장'은 어떻게 되었는가. 소설은 덕수산장이 화재가 난 것에서 끝나지만 실제 기록을 찾아보면 1966년 4월 화재로 전소되고 1973년 6월 완전히 철거되었다.

 

소설의 첫 페이지는 '이 세상에는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로 시작한다.

무엇을 유산으로 남겨야 할까. 혹은 유산으로 무엇을 받아야 하는가.

윤덕영의 유산과 고모의 유산이 그 답이 될 듯 하다.

 

 

-

 

오랜만에 심윤경의 장편을 읽으며 이 작가가 소설을 쓰는 정서의 기저는 역시 『나의 아름다운 정원』이구나 한다. 인간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끝내 서로의 아픔을 보듬고 긍정과 희망을 끌어안는다. 이것이 윤원섭 때문에 환장하지만 그럼에도 책을 덮는 마지막 순간에는 살짝 웃을 수 있었던 원천이다.

 

 

20230103050810_b166b24690c410d63f742caf60e23fae_jfop.jpg

 

 

* 댓글을 읽거나 작성을 하려면 로그인을 해야 합니다.

Total 338건 1 페이지
Review 목록
번호 분류 제목 날짜
338 영상 페어플레이(2023) 24.03.10
337 도서 지구에 마지막으로 남은 시체ㅣ레이 브래드버리 24.03.06
336 도서 갈대 속의 영원ㅣ이레네 바예호 24.02.14
335 도서 문학이 필요한 시간ㅣ정여울 24.02.13
334 도서 서머ㅣ조강은 4 24.02.10
333 도서 조국의 시간ㅣ조국 24.01.21
332 도서 리어 왕ㅣ셰익스피어 23.12.28
331 도서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ㅣ비비언 고닉 23.12.21
330 북마크 LineageㅣTed Hughes 23.12.12
329 도서 또 못 버린 물건들ㅣ은희경 23.12.05
328 도서 저주토끼ㅣ정보라 23.12.02
327 도서 인생연구ㅣ정지돈 23.11.06
326 도서 그렇게 우리의 이름이 되는 것이라고ㅣ신유진 23.10.29
325 도서 몽 카페ㅣ신유진 23.10.27
324 북마크 Mon Caf´eㅣ신유진 2 23.1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