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오래 준비해온 대답』 >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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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9700 bytes / 조회: 802 / 2023.01.06 01:44
[도서] 김영하 『오래 준비해온 대답』


그러니까,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은, 김영하는 정말 글을 잘 쓴다는 거다. 여기서 '잘 쓴다'는 의미는 '재미있게' 쓴다는 걸 뜻한다. 글을 어찌나 맛있게 잘 쓰는지 김영하의 산문은 종종 단편소설처럼 읽히기도 하는데 이번 산문집에선 멕시코 아바나에서 쿠바산 시거를 구하기 위해 골목 안 깊숙이 들어갔던 일화가 그랬다. 불과 서너 페이지에 불과한 일화는 똑 떼어내 단편소설로 읽어도 무방한, 기승전결을 완벽하게 갖춘 단편소설의 모범이다. 

 

 

소설 『검은 꽃』을 영화로 만들어볼까 하던 시절, 나는 영화감독과 프로듀서와 함께 아바나로 향했다. 도착 첫날 저녁, 쿠바산 시가를 사러 동네 담뱃가게에 들어갔지만 팔지 않았다. 우리가 시가를 구하는 것을 밖에서 보고 있던 이십대 청년 하나가 우리를 따라오더니 거래를 제안했다. 자기 집에 공장에서 빼돌린 몬테크리스토가 있다, 원한다면 싸게 팔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를 따라 뜨거운 증기탕 같은 아바나의 좁은 골목길로 걸어들어갔다. 플라스틱 주렴을 드리운 방에서 사내들이 러닝셔츠만 입은 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고 여자들이 아이들에게 소리를 지르다 우리가 지나가자 말을 멈췄다. 우리를 낚은 친구는 연신 뒤를 흘깃거리며 우리를 데리고 골목 깊숙이 들어갔다. 문득, 아바나에서 아무나 따라가서는 안 된다고 말하던 누군가의 경고가 떠올랐다. 그러나 돌아서기엔 이미 늦어 있었다. 우리는 그의 집으로 따라 들어갔다. 우리가 모두 좁은 방으로 들어가자 뒤에서 양철 현관문이 쿵 하고 닫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 셋은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 추켜올렸다. 그러고는 동생으로 보이는 어린 소년의 등을 두들겼다. 소년은 냅다 뛰어나가더니 망을 보았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집 안의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늙은 할머니 하나와 그녀의 며느리로 보이는 젊은 여자, 그리고 러닝셔츠를 입은 중년 남자, 그리고 십대 소년이 하나 더 있었다. 우리는 그제야 우리를 데려온 친구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키가 크고 목이 길었는데 눈에 띄게 긴장하고 있었다.(중략…)

우리는 짐짓 시가에 대해 잘 아는 척하느라 시가를 코에 대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아보았다. 그리고 우리끼리 한국말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일부러 무표정하게 진행된 그 대화들. 한 박스에 얼마래요? 아, 그래. 꽤 싼데. 진짜 맞을까? 저렇게들 긴장하는 것 보면 진짜 같지 않아요? 한 세 상자 달라고 할까? 그랬다가 나중에 세관에서 걸리지 않을까?

사고 싶은 수량을 정하고 우리가 그들에게 고개를 돌렸을 때, 우리는 방심한 채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온 가족의 절실한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우리의 대화를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언제 그 애절한 눈빛을 거두어야 할지를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황급히 눈길을 돌렸지만 우리에게 쏟아지던 그 눈길을 이미 보아버린 뒤였다. 저 다섯 박스만 팔리면, 저 다섯 박스만 팔리면, 저 다섯 박스만 팔리면, 그리하여 저 달러가 우리 손에 들어온다면,

저 달러가 우리 손에 들어온다면, 저 달러가 우리 손에 끝내 들어오기만 한다면, 몸에 쫙 달라붙는 외화상점의 청바지도 살 수가 있고, 화사한 멕시코산 스커트도 살 수가 있고, 작은 세탁기도 하나 들여놓을 수 있을지 몰라. 그들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중략…)

택시를 잡아타고 아바나 외곽의 번듯한 국영호텔로 돌아올 때까지도 그 후텁지근한 골목에서 마주친 끈적한 눈빛들이 잊히지 않았다. 욕망을 감출 수 없는, 그럼으로써 남을 부끄럽게 만드는 삶들이 뜨거운 양철지붕 아래에서 드글거리고 있었다. 우리는 카리브해를 바라보며 독한 술을 마시고 시가를 피웠다. 쿠바산 담뱃잎을 말아 만든, 잎맥 사이로 촘촘하게 스민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부드러운 몬테크리스토는 아주 훌륭했지만 텁텁했다.

 

-pp.240-242

 

 

시칠리아로 간 작가의 단기 체류기를 읽고 있노라니 그리스인 조르바를 자유롭게 했던 카르페디엠이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조르바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지중해가 특별했던 것이다. 


나는 이미 그것의 일부였다. 수백만 년 전 내 발밑 저 깊은 곳에서 시작된 지각변동이 이 섬과 저 건너의 불카노를 만들었다. 지도만 보고 작다고 무시했던 섬이었다. 그러나 작고 보잘것없는 것은 바로 나였다. 그리고 그런 자각이 내게 상상하지 못했던 쾌감을 주었다. 그리스인들이 내가 서 있는 바로 여기에 서서 이 괴상한 섬을 만든 신을 상상한 것은 자연스런 행동이었다. 외눈박이 거인들이 해협을 지나가는 선량한 선원들에게 집채만한 돌을 던진다고 믿은 것도 마찬가지였다. 협곡의 곳곳에는 어디서 굴러왔는지 알 수 없는 바위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현대의 나는 고대 그리스인들과는 달리 그것이 화산활동의 결과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알고 있다고 해서 그 경외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곧 이 세계의 먼지로 사라질 것이나 내가 서 있는 이 불안정한 화산도와 해협, 뜨거운 바다는 오래도록 남아 전설을 생산하리라. 그런 생각을 하고있는 내내 구름들이 몰려왔다가 바다 위로 흩어졌다.

 

pp.120,121

 

가끔 존재하는 자로서 책임과 의무가 무겁고 갑갑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밑줄 그은 부분은 읽는 순간 일시적으로나마 스스로가 가벼워지는 것같은 착각을 느꼈던 대목이다. 굳이 존재증명을 위해 고군분투하지 않아도 조르바처럼, 키팅 선생의 충고처럼 내가 자연의 일부임을 인정하고 'seize the day!' 뻔뻔하게 외쳐도 된다는 공명. 아마 작가가 이 글을 쓸 때의 기분도 나와 같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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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시라쿠사를 돌아다니던 작가가 불현듯 사고를 치고 시라쿠사로 도망친 카라바조를 이해하는 순간이 왔을 때(p.222)의 묘사는 아, 이 양반은 어쩔 수 없는 뼛 속 깊이 작가구나 싶다. 

 

M에게 "시칠리아 섬으로 들어가는 기차는 페리를 타고 해협을 건넌대 신기하지!" 했더니 '시칠리아 섬 크기가 얼마나 되냐'고 묻는다. 제주도 반만큼은 되지 않을까? 되묻는 나의 시칠리아 섬에 대한 상상이미지는 정말로 딱 그만큼이었다. 그러고선 잊어버렸는데 몇 시간 후에 M이 '남한의 1/4'이라고 알려왔다. 오......!

 

나도 여행을 좋아하지만 '좋아하는' 것에 '과정'은 포함되지 않는다. 짐을 챙기고 수속하고 목적지에 도착해 짐을 풀기 전까지의 과정이 귀찮아서 계획 단계에서 여행을 포기하는 일이 많은 내게 김영하의 시칠리아행은 처음부터 경이로운 세계의 연속이었다. 나는 저렇게 못할 것 같은데, 싶은 앓이가 계속 터져나오는 것이다. 그러니 나 같은 사람에게 김영하의 여행기는 선물이나 다름없다. 

 

그닥 두껍지 않은 분량에 초반은 리얼 메타마냥 여행초기의 산만하고 정신없음이 느껴지는 이 책은 독서 중에도 완독 후에도 포만감이 대단히 만족스럽다. 당연한 얘기지만 완독 후 서점 장바구니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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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예쁜데 제목이 책등에만 있어 예쁨을 다 찍지 못한 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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