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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9457 bytes / 조회: 814 / 2023.01.11 04:44
[도서]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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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ㅣ창비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_p.7

 

소설을 시작하는 첫 문장이 시사하는 바는 명백하게 '갑작스런 죽음'이다. '갑작스런 죽음'이 시사하는 바 또한 명백하다. 바로 가족을 위시한 주변인이 망자가 된 이를 미처 보낼 준비가 안 됐다는 거다. 

부고 소식을 듣고 서울에서 구례로 내려온 '나'는 아버지 생전 지인들에게 부고를 보내고 장례 준비를 한다. 소설은 갑자기 죽은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사흘 간 벌어지는 풍경을 담았는데 여기까지는 일견 박철수 감독의 <학생부군신위>의 변주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 사람이 겪기엔 그 인연과 사연이 하나같이 구구절절하다. 왜냐하면 고인이 '빨치산 고상욱 씨'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부고를 듣고 달려온 사람들의 면면도 다양하다. 그중 특히 마음이 아팠던 일화는 작은 아버지의 사연. 하도 말이 많아서 입이 방정이라고, 저놈 입 잘못 놀리다 언제 한번 경을 칠 거라고 타박을 듣던 작은 아버지는 바로 그 입 때문에 비극을 겪고 이후 말이 없는 과묵한 사람으로 변했다. 


"고상욱이 본 사람 손 들어!"

군인의 입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불린 순간 여덟살이던 큰언니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언니는 직감적으로 고상욱이 작은삼촌이라는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혹 누가 쨔가 고상욱이 조칸디라, 이르기라도 할까봐 언니는 가슴 졸이며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런데 키가 작아 언니보다 두줄 앞에 앉아 있던 작은아버지가 번쩍 손을 들었다.

"고상욱이 우리 짝은성인디요! 짝은성이 문척멘당위원장잉마요."

면당위원장은 면에서 제일 높은 사람, 작은아버지는 형이 자랑스러웠던 것이다.

(p.126)

 

그 시절 그 곳에 있었던 이유만으로 피해자이며 가해자인 역설에 발목을 잡힌 작은아버지는 생전에 화해하지 못한 형의 장례식장에서 결국 눈물을 터뜨린다. 같은 눈물이라도 노인의 울음은 평생의 회한이 담기기 마련이라 유독 애통하다. 작은아버지는 나, '고아리'와도 사연이 있는데 특히 '빨치산의 딸'이라는, 그 시절 출구 없는 연좌제의 터널에 갇힌 고상욱 씨의 딸 고아리가 가출했을 때 작은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쫓아가서 데리고 돌아오는 풍경은 회화 한 점을 본 것 같은 인상이 남는다.


면 소재지를 지나고 저수지를 지날 때쯤 작은아버지가 불렀다.

"아리야. 고만 가자."

들은 척도 않고 걷기만 했다.

"워쩌겄냐, 가야제."

(pp.207, 208)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서사를 아우르는 구성 방식이 재미있는 소설이다. 장례식장에 모인 사람들의 기억 속 고상욱 씨는 비극적이다. 그리고 고상욱 씨의 혈연이라는 이유로 연좌제의 고통을 받았던 가족 역시 저마다 비극적인 서사를 갖고 있다. 그런데 '오죽하믄'과 '민중'을 평생 입에 달고 살았던 고상욱 씨는 정작 피식피식 웃음을 자아내는 희극적인 인물이다. 왜일까. 이쯤에서 찰리 채플린의 명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거기에 한마디 더 얹어본다. 그것이 바로 삶의 아이러니가 아니겠는가 라고.

   

(상략)한두해 뒤, 무슨 드라마를 같이 보던 어머니가 담배 태우는 여성 연기자를 보더니 쯧쯧 혀를 찼다.

"아이고, 뉘집 딸내민고. 가시내가 담배를 다 태우네이."

나는 옆에서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나에게 건강 운운했던 것은 여자가 어디, 이런 말을 했다가는 당장 아버지와 나로부터 비난이 쏟아질 것을 예상한 위선이었던 것이다. 드라마 따위 개나 주라지. 뉴스 외에 본 적 없는 아버지가 이번에도 신문을 보다 끼어들었다.

"뉘 집 딸은 뉘 집 딸이여. 자네 딸이제."

어머니는 누가 들을세라 사방을 살피고는 나지막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야는 진작에 끊었어라. 아니, 끊기는 멋을 끊어. 호기심에 한번 태워본 것이제 야가 무신 담배를 태운다고 그러요? 누가 들을까 무섭소."

어머니가 몇번이고 부정했으나 아버지는 콧방귀만 뀌었다. 애연가였으니 끊기 어려운 속내를 알았겠지. 어머니가 당신 딸은 절대 담배 태우고 그런 애가 아니라고 계속 항변하자 참다못한 아버지가 엄숙하게 종지부를 찍었다.

"넘의 딸이 담배 피우먼 못된 년이고, 내 딸이 담배 피우면 호기심이여? 그거이 바로 소시민성의 본질이네! 소시민성 한나 극복 못헌 사램이 무신 헥명을 하겄다는 것이여!"

그때 어머니 나이 환갑을 넘었다. 환갑 넘은 빨갱이들이 자본주의 남한에서 무슨 혁명을 하겠다고 극복 운운하는 것인지,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블랙 코미디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자리를 떴다.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pp.242-244)

 

시중 웬만한 만담을 능가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대화는 대부분 뭔가 아주 치열한 것 같은데 또 한편 뭔가 아주 엉성해서 사람을 무장해제시키는 웃음이 터지게 한다. 근데 리뷰를 쓰면서 문득 떠오른 의문. 아버지 이름은 고상욱 씨인데, 어머니 이름은 뭐였더라... 

대충 책을 넘겨봐도 어머니 이름을 못 찾겠다. 언급됐는데 못 찾는 것인지, 언급이 아예 안 된 것인지. 이 부분은 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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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문학적으로 이 소설에 아쉬운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고상욱 씨의 말투를 빌어)결의 말을 앞두고 몇 장면은 한국영화의 고질병 같은 신파를 의심케하는 내용이 이어진다. 그것도 시종일관 시크하고 냉담하던 고아리를 통해. 

장르소설계 언어로 말하자면 보통 이걸 캐붕이라고 하는데, 장례식에서 일어나는 천태만상과 장례식장을 찾아온 다양한 군상들의 사연만으로도 충분한 것을 마지막 온점을 찍기 전 완결성에 대한 강박처럼 엿보이는 장면들은 오히려 교조적인 냄새가 나서 아쉽다. 꽃을 보여주면 사람들이 알아서 아름답다, 향기롭다 느낄 것을 굳이 '이 꽃이 참 예쁘죠, 향기롭죠' 하는 것 같달까.

 

어려운 내용도 서술도 아닌데 생각보다 완독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던 이유를 생각해보니 나와 동시대의 얘기가 아니어서 그랬던 것 같다. 특히 소설을 관통하는 모든 비극의 출발점인 신분조회, 사상검증의 명분이었던 연좌제는 이성으로는 '끔찍하다, 애통하다' 분노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물들 사연에 감정적으로 이입하기보단 관찰자의 시선으로 본 건 아닌지 되짚어 보게 된다. 이건 독자로서 나한테 아쉬운 부분이지만, 생각해보면 이것도 결국 나는 저들보단 그나마 나은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반증일 거다.

 

독재(자)의 가장 큰 비극은 국가가 국민을 가려가며 법과 제도 아래 보호한다는 것이다. 연좌제란 그런 것이다. 내 국민이고 싶으면 고분고분 내 말 잘 들으라는 거지. 그러니 유권자들은 늘 명심해야 한다. 비극은 결코 먼 데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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