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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8119 bytes / 조회: 555 / 2023.03.08 02:06
[도서] 최혜영 『그리스 비극 깊이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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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혜영(푸른역사)ㅣ2018.05

 

 

그리스 신화의 대표적인 특징은 신과 인간이 뒤섞인 이야기라는 건데, 그리스 신들은 어느 신들처럼 나홀로 고고하지 않고 인간처럼 칠정오욕을 느끼며 때로 인간의 일에 끼어들어 인간 세계의 질서를 흔든다. 대표적으로 누가 누가 가장 예쁜가, 미모를 다투던 세 여신이 던진 사과 하나에서 촉발된 '트로이아 전쟁'처럼. 

 

책을 처음 펼쳤을 때만 해도 '그리스 신화 심화 단계' 쯤으로 생각했던 『그리스 비극 깊이 읽기』는 그리스 비극 3대 작가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이 당시 시대 상황, 정치적 상황과 어떤 이해 관계로 맞물려있는지 들여다보는 내용이다. 저자는 3대 작가가 극을 쓰고 공연을 올리던 시기는 공연 극장이 있던 아테네를 포함한 도시 국가들의 정치 상황이 무관하지 않으며 당시 비극 공연은 자국 시민의 기를 살리고 경쟁국 혹은 적국의 사기를 꺾는 일종의 선동/선전의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그럼 왜 하필 '비극'일까.

 

본문 중 인상적이었던 한 대목은 '비극'에 대한 정의인데 그러니까 저자에 의하면, '우리가 대개 '비극'으로 번역하는 'tragedy'의 그리스 원어는 'tragoedia'인데 이 단어가 일본을 거쳐 한국에서 '비극悲劇(슬픈극)'으로 번역된 것이다', '번역 과정에서 본래 의미가 변질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이 경우도 이에 해당된다'(p.248)' 고 한다. 

그리스 원어의 원래 의미는 '찬양하다' '성스러운 노래'라고 하니, 당시 아테네가 세 작가의 비극을 공연에 올려 어떻게 활용했는가 본문을 개괄해보면 원어의 의미에 수긍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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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슈탈트 붕괴 까지는 아니지만 책을 읽으면서 혼란이 왔던 건 신화와 역사가 충돌하는 지점인데 한 예로, 테세우스와 페리클레스가 공존하는 서술이다. 어렸을 때 읽었던 『플루타르크 영웅전』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인물이 페리클레스인데 신화 속 가상 인물이라고 생각했던 테세우스와 아네테 민주정의 대표적인 인물 페리클레스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등장하니 내가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신화'에 대하여 개념 혼란이 온 것.

 

당시 지중해 패권을 다투던 대표적인 도시국가가 아테네, 테바이, 스파르타, 아르고스, 코린토스 등인데 이들 도시들은 모두 영웅을 갖고 있다. 아테네 '테세우스', 테바이 '오이디푸스', 아르고스 '페르세우스', 코린토스 '벨레로폰'이 그것인데, 재미있는 건 아테네가, 그러니까 아테네의 비극 작가 3인방이 남의 나라 영웅의 서사를 가져다 자국의 정세와 상황에 맞추어 입맛대로 각색했다는 점이다. 그러다보니 쓰여진 시기에 따라 오류도 발생했는데 예로 트로이아 전쟁의 원인었던 헬레나가 어느 때는 지조와 절개를 지킨 여성으로 등장하는가 하면 어느 때는 희대의 요부로 등장하는 식이다. 

 

비극 서사의 주인공은 예외 없이 영웅들의 몫인데 아테네와 적국이거나 경쟁국이었던 도시의 영웅들의 비극 서사가 사실이든 아니든 너무나 잔인하고 처참하다. 대표적인 인물이 '태어나지 않았어야 했다'고 절규했던 오이디푸스인데, 작가 3인방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남의 나라 영웅들이 자국에게 배신당하거나 실망하여 아테네로 망명을 하거나 혹은 아테네를 찬양하며 추후 전쟁이 벌어질 때 자국이 아닌 아테네를 도와 승리를 가져다 주겠노라 선언했다고 노래한다. (늘그렇듯 부끄러움은 나의 몫이지) 

 

다음은 에우리피데스의 <미친 헤라클레스>에 등장하는 장면. 스파르타 영웅 헤라클레스는 시종 징징대고 훌쩍이는 나약한 인물이지만 아테네 영웅 테세우스는 자살하려는 헤라클레스를 만류하고 용기를 북돋아주며 함께 아테네로 가자고 권유한다. 이에 헤라클레스와 그의 아버지는 테세우스를 칭송하며 아테네에 축복을 내린다.(pp.149, 150)

 

p.149_

 

이 비극은 특히 세 가지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극장을 가득 메웠을 아테네인 및 동맹국 사절단을 향해 헤라클레스의 나약함 및 그의 가문에 내린 저주와 비극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임으로써, 그를 수호신으로 받드는 스파르타에 기죽을 필요가 없으며,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심리적 자신감을 주고자 했을 것이다.

다음으로 스파르타를 향해서는 아테네의 국부 테세우스와 스파르타의 국부 헤라클레스는 원래 친구 사이였으며, 전 그리스가 헤라클레스를 외면했을 때도 아테네 왕 테세우스만이 헤라클레스를 신실하게 도와주었는데 이를 잊고 아테네와 전쟁하는 것은 은혜를 모르는 처사임을 꾸짖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서로 동맹을 맺고 아테네를 공격하던 스파르타와 테바이의 관계와 관련해서는, 테바이의 참주 리코스가 신의 없이 헤라클레스의 가족을 죽이려 했듯이, 테바이는 페르시아 전쟁 당시에도 페르시아에 붙어서 그리스 동맹국을 배신한 바가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신실하지 못한 테바이와 손잡고 아테네를 공격하는 행위를 중단할 것을 촉구하는 메시지도 담겼다고 볼 수 있다.

 

 

디오니소스 극장에 올라갔던 비극 서사가 대부분 이런 전결 구성을 하는데 뭔가 꽁기한 건 나만인가; 이 정도면 귀여운 범위를 벗어난 것 같은데...

 

완독 소감은 뭔가 가벼운 학술서를 읽은 기분이 든다는 거. 기원전 지중해를 지배했던 도시국가들의 역사를 쭉 훑어본 기분도 들고. 부엔디아 가문 20대의 서사를 읽은 기분도 들고.

 

나는 본문과 주석을 함께 읽지 않는 독서 습관을 갖고 있는데 본문 마지막에 부록으로 딸린 연대기와 비극 연표, 무엇보다 내용이 충실한 주석을 보니 대출이 아니라 구입해서 읽었어야 했나 뒤늦게 아쉬운 생각을 했다. 그랬다면 대출기한에 쫓기지 않고 좀 더 여유있게 읽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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