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아람 『매 순간 흔들려도 매일 우아하게』 >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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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문(多聞),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8390 bytes / 조회: 380 / 2023.03.12 19:58
[도서] 곽아람 『매 순간 흔들려도 매일 우아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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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할 년, 캔디 걔 진짜 웃기는 년 아니냐? 야, 외롭고 슬픈데 왜 안 울어. 걔 사이코패스 아니야?"

잘 우는 여자 동백을 용식(강하늘)이 <말괄량이 캔디>의 주제가인 "외로워도 슬퍼도~"를 부르며 달래는 장면에 나오는 이 대사는 '콜럼버스의 달걀' 같은 인식의 전환을 가져다주었다. 그러게, 외롭고 슬프면 울면 된다. 망할 캔디 년 따라 굳센 척하느라 몇십 년 힘들게 살았구나.

 

p.125,『매 순간 흔들려도 매일 우아하게』 

 

 

발췌는 곽아람의 『매 순간 흔들려도 매일 우아하게』를 읽다가 박장대소했던 대목. 

S가 문제의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애청자였다. 가끔 우리집에서 S가 이 드라마를 볼 때 어깨 너머로 흘끔흘끔 봤던 <동백꽃 필 무렵>은 언제 각 잡고 앉아서 정주행해야지, 벼르고 있는 드라마인데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곽아람의 에세이에서 튀어나왔다. 눈이 글자를 읽는 것과 동시에 공효진의 대사가 육성 그대로 귓가에 들리는 동시성이란, 이런 게 바로 하이퍼리얼리즘이지.

 

나는 코미디/개그를 보면서 웃은 기억이 거의 없다. 유행어밈인 듯, 세뇌시키듯 되풀이하는 대사는 대개 본인과 타인을 비하하는 가스라이팅으로 가득해서 저게 왜 웃긴지 1도 이해가 안 가고, 무대 공간(=현장) 때문인지 뭔지 모르지만 고래고래 지르는 소리는 피곤하기만 하고, 그들(희극배우와 관객)은 서로 뭐가 통하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나는 모르니 심심하고. 뭐그렇다.

 

그럼 나는 무엇에 웃는가. 무엇이 나를 웃게 하는가.

매체로 특정 짓자면 사는 동안 나를 가장 많이 웃게 한 건 두 말 할 것 없이 텍스트다. 소설, 산문, 커뮤니티 자게, 기사 댓글, 하다 못해 누가 끄적이고 버린 낙서까지 그게 뭐든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진 세계에는 슬랩스틱, 풍자, 은유, 독설, 역설을 망라한 과장된 희비극의 몸짓과 표정, 발성 그 모든 것이 다 있다. 최근에도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박장대소했던 건 어느 책의 어느 페이지를 읽던 도중이었다.

 

최근 도서관에서 곽아람의 에세이를 대출하면서 '이제 곽 작가의 책은 그만 살 생각임' 장담했던 게 무색하게 첫 목차를 채 다 읽기도 전에 온라인서점에 접속해 책장에 없는 곽아람의 책을 담았다.

뭐랄까. 이 책 『매 순간 흔들려도...』에 '동류'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곽아람을 읽는 이유를 찾자면 바로 이 '동류'에서 느끼는 내적친밀감이 아닌가 싶다. 관심사가 같으면 처음 보는 사람과도 종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신나게 떠드는 것처럼 말이다.

 

저자는 '평생 가장 책을 많이 읽은 시기는 취학 전에서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다'라는 문장으로 본문을 시작하는데 나와 비슷하다. 부모님의 추억보정 증언에 의하면 나는 돌을 지나면서부터 책을 읽었다고 하는데(설마 읽었겠는가 봤겠지) 실제 내 최초의 기억 이미지도 양손으로 야무지게 움켜쥔 그림책이다. 하여간에 자음모음의 이치를 깨우친 뒤로 말그대로 사생결단하듯 '읽어재꼈'는데 대학 입학 전까지 읽은 책이 아마도 내 인생 전체에 걸쳐 읽은 책의 (대략)절반쯤 된다. 그리고 이 비율은 집 책장에 꽂힌 책을 다 읽으면 역전될 예정이고.

 

곽아람은 그동안 10여 권의 에세이를 냈는데 그녀의 에세이는 (주로)어렸을 때 읽었던 책 중 평생에 걸쳐 자신에게 영향을 주었던 혹은 영향을 주고 있는 책을 중심으로 과거와 현실과 미래를 복기하고 성찰하는 공통점이 있다. 이러한 공통점 탓인지 (심리 분석 따위 의미 없다 생각하지만) 곽아람의 글을 거듭 읽다 보면 유년기에 읽은 책이 아니라 유년기 자체가 평생을 걸쳐 그녀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기자보다는 소설가에게 더 어울릴 것 같은 예민하고 섬세한 감성도 마찬가지. 사실 이런 '소녀 감성'은 작가의 글쓰기에 훌륭한 재료이므로 작가에게나 작가를 좋아하는 독자에게나 좋은 일이다.

 

고3 때 대학 진학 상담 첫날 담임샘의 추천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면 아마도 저자와 동문 선후배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절반이라도 '미술'에 관심이 있었더라면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담임샘이 '고고미술사'를 짚는 순간 내가 떠올린 건 먼지를 뒤집어 쓰고 황량한 고대유적지를 돌아다니는 상상이었다. 한마디로 '미술'은 실종되고 '고고'에 꽂힌 거다. 내가 난감해하는 걸 눈치챘는지 담임샘도 이후 해당 학과는 다시 거론하지 않았다. 담임샘이 하고 많은 전공 중에 왜하필 '고고미술사'를 권했는지 궁금해진 건 그때로부터 시간이 한참 지나 우뇌형 인간으로서 나의 본류를 인지하면서다. 최근 일인데 저자의 신간 『공부의 위로』를 읽던 중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 달이 지나기도 전에 문과생인 내가 수학II 미적분과 씨름하고 있을 때 고고미술사는 '미술사 입문'을 들었다는 간접 정보?를 접하고 철지난 억울함에 몸부림을 쳤다. 이때 '억울'의 대상은 '미술사'가 아니라 '수학II'다. 내가 수강하지 못한 과목이 아니라 수강해야만 했던 과목에 분노했다는 얘기임.

지난 얘기가 다 그렇듯 그냥그런 라떼는 어쩌고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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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에 관한 작가의 고민이 자주 읽히는데 승진의 계단이 좁아질수록 남초가 두드러지는 직업군에서 십수 년을 버틴 만큼 직업인으로서 여성의 역할과 지위에 대한 고민은 공감을 일으킨다. 그게 한국 여성의 현실이라고 해도 힘든 건 힘든 거라.

 

긴즈버그 편은, 긴즈버그의 삶이나 그녀가 성취한 운동의 방향성도 훌륭하지만 정작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 건 긴즈버그를 형용하는 '싸우는 여자', '연대하는 여자'였다. 이유는 이들 형용이 가진 레토릭의 기능 때문이다.

여성운동은 왜 연대가 안 되는가. 안 하는 건가, 못 하는 건가. 개인적으로 여성운동의 방향성이 '여자'가 아닌 '싸우는'과 '연대'에 방점을 찍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무엇과 싸우고, 무엇을 위해 싸우고, 누구를 위해 누구와 연대할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 전장에서 깃발을 어디에 꽂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늘 중차대하지 않았는가. 긴즈버그는 자신의 삶으로 이런 방향성을 증명한 훌륭한 전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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