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리, 당신 말씀이 옳았습니다. 발광하시는 걸 제 눈으로 보았다고 양심에 꺼림 없이 맹세하려면 적어도 한 번은 봐두는 게 좋겠습니다. 나리가 여기 요 모양으로 계시는 것을 본 것만으로도 웬만한 발광은 본 셈이지만요."
"내 한 말이 무슨 말이었겠느냐? 산초, 자, 잠깐만, 한바탕 내 해 보여 주마. 그래도 한 번 할 참에(신경信經 한 번 외우는 순간瞬間)."
이러고는 댓바람에 바지를 벗고, 속옷 바람이 되어 가지고 다짜고짜 양손으로 두 발바닥을 딱딱 때리기 두 번, 머리는 아래로 발은 공중으로 물구나무 서기 두 번을 하느라고 그만 무엇이 드러났다. 산초는 두 번 보지 아니할 양으로 시난테의 고삐를 뒤로 잡아채었다. 그러고는 이만하면 제 주인이 발광하셨더라는 것을 넉넉 맹세하고 말할 수 있다고 만족해하는 것이었다.
- p.286, <돈키호테> 올재클래식스
장담하기로 돈키호테와 산초는 문학 역사상 최고의 만담커플이다. 두꺼운 <돈키호테>는 사실상 이 둘의 만담으로 가득하다.
'이름 높은 한량과 마음씨 착한 그러나 머리는 제법 둔한'(p.86) 이웃집 농부가 만났으니 그들이 야반도주하는 풍경이 이러하다.
그리고 불안했던지 산초 판사가 돈키호테에게 다짐을 받는다.
- p.87
이쯤 되면 산초 판사를 꾀어낸 돈키호테가 단순히 이름 높은 한량이기만 한 게 아니라 제법 영악한 한량임을 알 수 있다. 아무나 적당히 고른 게 아니라 딱 제게 맞는 종자를 간택한 걸 보면 말이다. 아울러 생각하건데, 산초는 큰 섬에 눈 멀어서가 아니라 그저 사는 게 심심해서 이웃집 한량을 따라나선 게 아닐까, 그런 의심... 한마디로 세상천생연분인 거지.
내가 갖고 있는 돈키호테.
창비 판도 산 것 같은데 어디다 꽂아뒀는지 보이질 않는다. 이사 후 정리할 엄두가 안 나서 책장에 대충 꽂았더니 필요할 때 책을 바로 못 찾는 웃지 못하는 일이 요즘 일상이다. 변명하자면 내가 게을러서가 아니다. 일단 책장 정리하는 게 보통 노동이 아니다. 첫 단계인 십진분류부터 골치 아픈 것이... 이하 생략.
제일 좋아하는 책은 도레의 삽화가 있는 열린책들판. 확실히 문자보다 그림이 직관적이라 삽화를 보는 순간 웃음이 먼저 터진다. 300부 한정수량이었다는 구스타프 도레의 삽화책은 지금은 증정하지 않는다. 열린책들판은 도서정가제 개정전 마지막으로 구입한 책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