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 안경군 > 설(舌)

본문 바로가기
Login
NancHolic.com 감나무가 있는 집 Alice's Casket 비밀의 화원 방명록
설(舌)
- 네 언어의 한계는 곧 네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by Ludwig Wittgenstein
3581 bytes / 조회: 986 / ????.06.05 13:30
내 사랑 안경군


사촌 동생이 여자 친구를 데리고 놀러왔을 때 있었던 일이다. 일주일 정도 있다가 내려 갔는데, 이런 저런 일이 있었지만 그 중 한 해프닝.

애들을 데리고 찜질방에 가는 길에, 책 대여점 앞을 지나치는데 갑자기 만화책을 빌리고 싶어졌다. 그래서 단골 등록을 하지 않은 그 대여점에 들어가서 책장을 쭉 훑어 보는데 드디어 보고 싶은 만화책을 발견했다.
"신분증 없으면 안 될 텐데?"라는 아이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계산대로 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예쁘장하게 생긴 그 아가씨, "신분증 주세요." 라는 것이다. (우쒸)
할 수 없이 포기하고 그냥 나오는데 아무래도 그 만화책을 반드시. 꼭. 봐야겠더라는 말이지. 한 마디로 꽂힌 거다. 그래서 가던 길을 되돌아, 등록되어 있는, 단골 대여점으로 애들을 끌고 갔다. 그래 봤자 3분 거리지만.
그런데 여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아무리 찾아도 아까 그 대여점에서 본 만화책이 없는 것이다. 한참을 책장을 뒤지고 다니니까 옆에서 기다리던 애들이 지루했는지 결국 한 마디씩 한다.
"못 찾겠으면 아저씨한테 찾아달라고 하지?"
하지만, "아냐. 내가 찾아 보면 돼!"라고 못 들은 척 다시 눈이 튀어나오게 열심히 책장을 뒤지는데 아아니, 당췌 그 만화가 없는 게 아닌가. 제길슨- 그러자 아이들이 나를 은근히 압박하기 시작한다.
"아저씨한테 찾아 달라고 해, 누나-"
그럴까? 그러나 가게 입구 카운터에 앉아 있는 아저씨를 흘깃 보니 (말이 아저씨지 사실상 총각인) 도저히 입이 안 떨어진다.

나무 : "안 돼."
사촌 : "뭐가 안 돼?"
나무 : "부끄러워."
사촌 : "제목이 뭔데?"

내 반응에 그 때까진 별 관심없던 애들이 뭔가 눈치챘는지 갑자기 눈을 반짝이기 시작한다. 하는 수 없이 "더 찾아 보고 없으면 그냥 가지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그 와중에도 책장을 훑는데 정말 책이 없다. 이쯤 되니 애들도 오기가 생기는지 자기들이 대신 물어 봐 준다고 제목이 뭐냐고 자꾸 묻고... ㅡ,.ㅡ
"대신 물어봐 줄게. 일부러 되돌아왔는데 안 빌리면 계속 생각날 거 아냐."라는 애들의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가서... 라기 보다는 사실은 꼭! 보고 싶은 마음에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못이기는 척 제목을 말해줬더니 제목을 듣자마자 애들이 막 웃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것들이 아저씨옆에 바짝 붙어서 속삭여도 시원찮을 판에 큰 소리로 온 가게에 다 들리도록,

"아저씨! <내 사랑 안경군> 어디 있어요?"

외치는 것이다. 중요한 결론은 그 대여점엔 '안경군'이 없었다! 그리고 우리가 대여해 간 것은 <차카게 살자>였다.
이름은 촌스럽지만 잠깐 펼쳐봤을때 안경군이 상당히 지적이고 날카롭고 카리스마 있게 잘 생겼더라, 그래서 그런지 이름하고 언밸런스한 그 만화책이 정말 궁금했다, 라고 뒤늦게 변명을 막 했지만 이미 내 변명은 귀에 안들어오는지 신나서 죽는 이 바퀴벌레 한 쌍들 같으니라고... 제목 좀 럭셔리하게 지어 주면 안되나? 이거야 원 부끄러워서 물어 볼 수도 없으니...
* 댓글을 읽거나 작성을 하려면 로그인을 해야 합니다.

Total 391건 26 페이지
설(舌) 목록
번호 제목 날짜
16 reload ??.03.22
15 스포츠를 볼 때 ??.03.08
14 채움과 비움 ??.03.03
13 『지각 인생』, 손석희 ??.08.18
내 사랑 안경군 2 ??.06.05
11 어느 멋진 날 ??.06.01
10 나는 달러가 좋아 ??.02.18
9 토지 ??.07.19
8 피곤한 독서 ??.06.28
7 고전, 다시 읽기 ??.05.10
6 방식의 차이 ??.05.08
5 쿨하게. ??.03.02
4 온라인에서 우연히 마주친 글 ??.02.24
3 이름 없는 괴물 ??.11.01
2 그녀들의 공통점 ??.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