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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舌)
- 네 언어의 한계는 곧 네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by Ludwig Wittgenstein
5933 bytes / 조회: 823 / ????.08.18 09:20
『지각 인생』, 손석희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내가 지각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학도 남보다 늦었고 사회진출도, 결혼도 남들보다 짧게는 1년, 길게는 3∼4년 정도 늦은 편이었다. 능력이 부족했거나 다른 여건이 여의치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이렇게 늦다 보니 내게는 조바심보다 차라리 여유가 생긴 편인데, 그래서인지 시기에 맞지 않거나 형편에 맞지 않는 일을 가끔 벌이기도 한다. 내가 벌인 일 중 가장 뒤늦고도 내 사정에 어울리지 않았던 일은 나이 마흔을 훨씬 넘겨 남의 나라에서 학교를 다니겠다고 결정한 일일 것이다.
1997년 봄 서울을 떠나 미국으로 가면서 나는 정식으로 학교를 다니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남들처럼 어느 재단으로부터 연수비를 받고 가는 것도 아니었고, 직장생활 십수년 하면서 마련해 두었던 알량한 집 한채 전세 주고 그 돈으로 떠나는 막무가내식 자비 연수였다. 그 와중에 공부는 무슨 공부. 학교에 적은 걸어놓되 그저 몸 성히 잘 빈둥거리다 오는 것이 내 목표였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졸지에 현지에서 토플 공부를 하고 나이 마흔 셋에 학교로 다시 돌아가게 된 까닭은 뒤늦게 한 국제 민간재단으로부터 장학금을 얻어낸 탓이 컸지만, 기왕에 늦은 인생, 지금에라도 한번 저질러 보자는 심보도 작용한 셈이었다.미네소타 대학의 퀴퀴하고 어두컴컴한 연구실 구석에 처박혀 낮에는 식은 도시락 까먹고, 저녁에는 근처에서 사온 햄버거를 꾸역거리며 먹을 때마다 나는 서울에 있는 내 연배들을 생각하면서 다 늦게 무엇 하는 짓인가 하는 후회도 했다. 20대의 팔팔한 미국 아이들과 경쟁하기에는 나는 너무 연로(?)해 있었고 그 덕에 주말도 없이 매일 새벽 한두시까지 그 연구실에서 버틴 끝에 졸업이란 것을 했다.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무모했다. 하지만 그때 내린 결정이 내게 남겨준 것은 있다. 그 잘난 석사 학위? 그것은 종이 한장으로 남았을 뿐, 그보다 더 큰 것은 따로 있다. 첫 학기 첫 시험때 시간이 모자라 답안을 완성하지 못한 뒤 연구실 구석으로 돌아와 억울함에 겨워 찔끔 흘렸던 눈물이 그것이다. 중학생이나 흘릴 법한 눈물을 나이 마흔 셋에 흘렸던 것은 내가 비록 뒤늦게 선택한 길이었지만 그만큼 절실하게 매달려 있었다는 방증이었기에 내게는 소중하게 남아있는 기억이다.
혹 앞으로도 여전히 지각인생을 살더라도 그런 절실함이 있는 한 후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침에 메모장에서 람이님의 글을 보고 문득 생각나서 올립니다.
한 때 온라인에서 굉장히 유명세를 탔던 글이니 아마 읽어보신 분들이 많으실 거라고 생각해요. 방송인(이자 대학교수인) 손석희씨의 글입니다.
저 글을 읽고, '당신에겐 20대의 팔팔한 젊음은 없었을지 모르지만 대신 40대의 노련한 성숙함이 있었겠지요'라고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납니다. 열정과 패기에서 20대의 그들과 같은 무게를 지녔다면 40대의 손석희씨가 그들에게 밀릴 이유가 없다는 것이 제 생각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방학 첫 날이면 엄마랑 머리를 맞대고 앉아서 열심히 그리던 일일 생활 계획표는 방학 때마다 늘 비슷했습니다. 콤파스를 대고 동그랗게 원을 그린 다음 24시간을 시간 단위로 잘게 나누고 '오늘의 할 일'을 써 넣는 거죠.
생각해 보면 평생을 이런 일일 생활 계획표를 가지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나이 몇에는 뭐를 해야 하고, 나이 몇에는 뭐를 해야 하고…… 등등. 그런데 막상 그 속을 가만히 들여보면 스스로가 아닌 사회가 만들어서 던져주는 당위에 강요받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제 친구는 얼마 전에 사회적 혹은 규범적 당위에 의하면 결혼을 준비해야 할 나이에 공부를 하러 떠났습니다. 한창 커리어를 쌓던 중이었고 결혼 문제도 있고, 고민을 많이 했지만 가장 큰 고민은 역시 '나이'였습니다. 결국 어렵게 유학 결심을 한 이 친구에게 모두들 '장하다'고 했고 그 말이 용기가 된다고 친구는 눈물을 보였어요.
살다보면 크게 의지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와 의지만으로는 안 되는 문제와 부딪치곤 합니다. 어려운 것(difficult)과 불가능한 것(impossible)의 간격은 그 의미만큼이나 크고 다르겠지만 만약 문제가 '어려운 것'이라면 그 이후는 전적으로 의지에 달린 것이겠지요.
'이솝우화'중 제가 좋아하고 또 즐겨 인용하는 '여우와 신포도'는, 여우가 포도를 먹으려고 포도 나무 밑에서 펄쩍 펄쩍 뛰다가 그것이 쉽지 않자 '저건 어차피 신포도라 맛이 없어'라고 자기합리화를 하며 포기하는 내용입니다. '어리석긴…' 싶지만 사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함정일지도 모릅니다. 살면서 종종 부딪치게 될 이 함정을 보란듯이 멋지게 뛰어넘는 우리들이었으면, 바래봅니다.

아아- 이론. 너무 신파적이었나요? 지송~ 제가 이른 아침엔 원래 이럽니다.(이른 아침부터 두들긴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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