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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舌)
- 네 언어의 한계는 곧 네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by Ludwig Wittgenstein
3893 bytes / 조회: 1,035 / ????.05.15 04:14
『내 남자의 여자』 13회를 보다가...


이윤기의 산문집에서 봤던가, 아니면 어느 신문의 사설에서 봤던가...
대충 <한 가지를 열심히 하면 그 한 가지를 잘 하게 되고, 그 한 가지를 잘 하게 되면 전문가가 된다>는 그런 내용인데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나역시 자기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좋다. 그런 의미로 전문가를 좋아하고 진짜를 좋아한다.
언젠가 '카리스마'라는 것의 정체가 궁금한 적이 있었다. 그러다 자기 일에 전문성을 이루고 그 전문성을 책임질 수 있을 만큼 넉넉한 그릇을 갖추게 되면 자연히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가 바로 그것이겠거니 혼자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내 남자의 여자, 13회』의 마지막 장면...
비오는 저녁, 지수(배종옥)의 집에 화영(김희애)가 찾아온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좀 당황했다. 화영의 얼굴이 화면 가득 잡히는 순간 나도 모르게 코끝이 시큰하더니 가슴이 뭉클해진 것이다.
김희애씨는 워낙 연기를 잘 하기로 소문난 탤런트이긴 하지만 쏟아지는 빗속에서 우산 하나 받쳐들고 친구를 보는 그녀의 얼굴, 눈빛, 표정선을 보는 순간 '저 배우는 정말 연기를 잘 하는구나' 하고 새삼 깨달았다.
연기(演技)의 사전적 의미는 '배우가 배역의 인물, 성격, 행동 따위를 표현해 내는 일'이다. 연기는 말그대로 '~척'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척'을 잘 하려면 부족해서도 과해서도 안 된다. 좀 '(부족하게) ~척'하거나, 좀 '(지나치게) ~척'하면 캐릭터와 배우의 얼굴이 중첩이 되면서 이중인격을 보는 것처럼 금방 어색해져 버린다. -덧붙여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나는 '(부족하게) ~척'하는 걸 고르겠지만.

베르톨트 브레히트의『브레히트 선집』중에는 다음의 줄거리를 가진 희곡이 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연극을 준비하던 감독은 리얼리티를 위해 전쟁중에 유태인들 사이에 악명이 높았던 나치 장교를 똑같이 흉내낼 배우를 뽑는 오디션을 연다. 전쟁 직후라 끼니 해결도 힘들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나치 장교를 아는 많은 유태인들이 오디션장에 찾아와서 저마다 자신이 가장 흉내를 잘 낼 수 있다며 차례로 연기를 해보인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늙고 힘없고 초라한 한 노인이 무대에 오른다. 그 노인은 앞의 다른 사람들과 달리 소품인 책상 앞에 앉아 평범하고 별 특징없는 동작만 할 뿐이다. 그러나 노인이 무대에 있는 동안 그곳에 있던 나머지 유태인들은 공포 때문에 숨도 제대로 못 쉰다. 유태인들은 너무도 변해버린 노인의 모습에 미처 노인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사실 그 노인이야말로 실제 주인공인 진짜 나치 장교였던 것. 결국 노인은 전혀 나치 장교를 닮지 않았다는 이유로 오디션에서 탈락된다. -「학살자」

이 희곡은 (내겐)브레히트의 '서사극 이론'을 쉽고 빠르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 희곡이기도 한데 그것의 중요성과 상관없이 리얼리티뿐인 세상은 상상만 해도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 그러니 팍팍한 우리네 삶을 위로하고 위안을 주는 것은 브레히트식 소격효과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katharsis)의 몫인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런 이유로 시청자에게 카타르시스를 주는 '(적당히) ~척' 할 줄 아는 배우 김희애는 더욱 반갑고 고마운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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