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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舌)
- 네 언어의 한계는 곧 네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by Ludwig Wittgenstein
3593 bytes / 조회: 892 / ????.04.07 13:17
맥락이 없는


나는 커피를 마실 줄 모른다.
아니 방법을 모른다. 그것은 반드시 내가 알지 않아도 되는 일이다.
내 손으로 끓인 커피는 영 맛이 없다. 그래서 커피를 더욱 이해할 수가 없다.
상관없다. 커피든 약이든. 그 씁쓸한 맛을 모르니까. 알고 싶지도 익숙해지고 싶지도 않다.
게다가 그것을 티끌만큼도 즐길 마음이 없다. 

출간 전부터 홍보가 요란했기에 흥미도 동하고, 괜찮다면 구입해서 읽어봐야지 생각했던 소설이었다. 그리고 오늘 문득 생각 나서 온라인 서점에 접속했더니 마침 책이 올라와 있다. 그리고 미리보기를 읽었다.

아...
이런...
맥락이 없다...

형용모순으로 가득한 위의 글은 맥락이 없다,란 표현이 딱 들어맞는 모범적인 사례로 꼽힐만 하다.
글 속의 화자는 커피를 마실 줄 모른다고 했다가, 마시는 방법(?)을 모른다고 했다가, 맛있게 끓일 줄 모른다고 하더니 종내는 커피를 이해 못 하겠다고 한다. 이어지는 문장은 더욱 처참하다.
도대체 무슨 소린지...? 외국 소설이라면 번역자 욕이라도 하겠건만.

'커피를 마실 줄 모른다'는 내용상 '커피 맛을 모른다'는 의미인 듯 하다. 그런데 이러한 의미로 읽으면, 이어지는 '내가 끓인 커피는 맛이 없다'는 모순이 된다.
커피를 마실 줄 모르는 사람이 커피의 맛을 논한다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이다. 맛을 모른다면서 자기가 끓인 커피가 맛이 없는 것은 뭐며, 하지만 커피 맛은 알고 싶지도 않고 즐길 마음도 없다는 건 또 무슨 얘기인가? 커피가 맛이 없는 것과 커피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도대체 무슨 상관 관계가 있나?

혹시 작가는 소설과 광고 카피를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여하튼, 위 문장의 최선은

나는 커피를 마실 줄 모른다.
상관없다. 커피든 약이든. 그 씁쓸한 맛을 모르니까. 알고 싶지도 익숙해지고 싶지도 않다.

정도가 될 것이다.

앞의 얘기가 다음으로 이어지고, 이어지는 다음 얘기는 앞의 얘기를 안고 가야 된다는 점에서 문장은 순서와 질서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소통이 어려워진다.
어려운 얘기도 아니다.

개울가에 올챙이 한마리
꼬물꼬물 헤엄치다
뒷다리가 쏘옥 앞다리가 쏘옥
팔딱팔딱 개구리 됐네

- 한때 전국 유치원생들의 애창곡이었던 '올챙이 송'
이 얼마나 기승전결이 명쾌하고 간결한가.

요즘 일본 소설의 여파로 서사는 사라지고 서술은 중요하지 않게 된 광고 카피 같은 한 줄로 문단을 채우는 글을 많이 본다. 주로 개인 블로그에서 많이 보였는데 최근 2년 새 출간되는 소설에서도 가끔 본다. 알맹이는 없고 껍질만 남은 이러한 감각만 좇는 글이 블로그의 일기장을 벗어나 소설로 출간된다는 건 문제가 좀 심각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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