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가을비, 해럴드블룸 클래식 > 설(舌)

본문 바로가기
Login
NancHolic.com 감나무가 있는 집 Alice's Casket 비밀의 화원 방명록
설(舌)
- 네 언어의 한계는 곧 네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by Ludwig Wittgenstein
8129 bytes / 조회: 816 / ????.10.14 03:06
10월, 가을비, 해럴드블룸 클래식


사산왕조의 샤푸리 야르 왕은 아내에게 배신을 당한 후, 세상의 모든 여성을 증오하게 되었다. 그래서 신부를 맞이하여 결혼한 다음날 갓 결혼한 신부를 죽여버렸다. 날마다 새 왕비가 하룻밤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나가는 그때, 나라의 한 대신에게는 세헤라자데라는 어질고 착한 딸이 있었다. 그녀는 자진해서 왕을 섬기며 밤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왕은 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은 나머지 그녀를 죽이지 않는데, 그녀의 이야기는 1001일 밤 동안이나 계속된다. 드디어 왕은 종래의 생각을 버리고, 그녀와 행복한 여행을 보내게 되었고(…중략)

『해럴드블룸 클래식』을 읽다가, 위의 내용을 동기로 삼아 얘기를 만들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초등학교 시절에 정기적으로 받아보던 어린이신문 - 정확한 명칭이 기억나지 않는다 - 에는 숨은그림찾기와 미로찾기가 있었는데, 미로찾기의 경우 흥이 있을 때면 입구에서 출구를 찾아가는 정석을 따르지만 흥이 없을 때는 출구에서 입구로 가는 역방식으로 후다닥 풀어버리곤 했다. 즉 미로찾기는 내게 별 재미도 없고 시시한 그저 그런 게임이었던 셈.
이러한 역방식이 언제나 해답으로 가는 만만한 길이 아님을 깨달은 것은 시간이 꽤 많이 지나서였다. 심심풀이로 집어든 어느 잡지의 한 이벤트 코너에서 다시 만난 미로는 그냥 보기에도 굉장히 복잡했고 역방식으로도 길을 찾는 것이 여간 어렵지가 않아서 연필 끝은 툭하면 미로 가운데서 헤매었다. 결국 출구를 찾았는지 지금은 기억에도 없지만 그 일은 내게 일종의 경험이 되었던 것 같다. 역방식은, 이를테면 역방식은 지름길을 가려는 게으른 꼼수일 뿐이라는...

부활의 '네버엔딩스토리'는 처음 음반이 나왔을 때부터 워낙 좋아하던 노래였지만 최근 탤런트 윤상현이 드라마에서 부르면서 다시 자주 듣게 되는 노래인데 낮에 다방에 접속했을 때도 이 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늘 듣던 노래의 어느 가사가 유난히 귓가에 오래 남았다. '너와 머물던 작은 의자위에 같은 모습의 바람이 지나네' 라는 부분이었다.
이 부분에서 느껴지는 정서가 어딘가 익숙하다 했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예전에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를 읽었을 때에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었다. 그리하여 오랜만에 꺼내 읽은, 비오는 밤 황동규의 시... 역시, 좋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 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 <즐거운 편지> 中, 황동규

내 책을 읽자!
고 결심한 것이 무색하게도, 부산행을 앞두고 도서관에서 발견한『헤럴드블룸 클래식』은 나를 고민에 빠트렸다.
뒷면의 수록작가 소개면까지 포함하면 900여 페이지에 이르는 두께를 손에 들고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신착도서라는 것에 끌려 결국 대출했지만 결론적으로 책은 한 번도 펼쳐보지 못한 채 집에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다시 집으로 이동만 한 셈이 되었다.
그리고 반납 기한을 하루 앞두고서야 펼친 책은 프롤로그에서부터 나를 감동시켰다.
일단 작가 소개에 등장하는, '블룸은 상상력의 자율성을 옹호하며 '문학의 위대성'이란 영혼의 숭고함과 미학적인 강렬함에서 발생하며' 부분이 마음에 든다.
그리고 프롤로그를 펼쳤는데 뭐랄까 감동적이었다고 할까.
문학비평가의(하물며 단순 서평가라도) 비평을 읽다 보면 저자가 작품에 대해 지배적인(=수직적인) 정서를 가지고 있는 듯한 느낌을 곧잘 받는데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이 고심해서 뽑은 작품에 대해 깊은 애정을 지닌 것이 느껴진다.
예를 들면 이런 부분...

내가 어렸을 적에 나는 슬픔에게 말했지.
"오라, 내 그대와 놀아주리." (중략)

그는 이제 하루 종일 내 곁에 와 있다.
밤이 되면 그는 돌아가며 말한다.
"내일 다시 오리다. 다시 와서 그대 옆에 머무르리라."

- p.13,『헤럴드블룸 클래식』

오브리 드 비어의「슬픔Sorrow」이라는 짧은 시(詩)를 인용한 다음, 블룸은 이렇게 덧붙인다.

이 시의 화자는 서두에서 자신이 슬픔을 놀이동무로 선택했다고 고백하는데, 그 후에도 그 선택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도 슬픔의 집을 지을 필요 없다. 왜냐하면 슬픔은 자신을 위해 집을 지을 것이고 그는 너무나도 충실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충실할 것이다. 우울증 초기에 스스로 그 안으로 빠져들게 되면 그것은 발전하여 이 특이한 우울함의 '부드러운' 속성에 의해 좀처럼 완화되기는커녕 계속해서 우울증에 사로잡히게 된다. - p.14, 같은 책

독서가 개인적 경험에 어떤 방식으로 체화되는가 보여주는 예가 아닌가 싶다. 물론 이러한 나의 이해 역시 내 개인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언젠가 '우울한 정서'에는 어떠한 중독적인 최면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이는 우울증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우울증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은 것을 종종 보았기 때문.
이 책의 정체는 원제『Stories and Poems for Extrmely Intelligent Children of All Ages』에서 드러나듯 41편의 매우 짧은 단편과 시 83편으로 채워져 있는 말하자면 문학 모음집이다.
역자가 역자 해제 첫 머리에 옮긴 피천득의 수필 일부분도 인상적이다. 

어려서 꿈에 나는 엄마를 찾으러 가고 있었다. 달밤에 산길을 가다가 작은 외딴집을 발견하였다. 그 집에는 젊은 여인이 혼자 살고 있었다. 달빛에 우아하게 보였다. 나는 허락을 얻어 하룻밤을 잤다. 그 이튿날 아침 주인인 아주머니가 아무리 기다려도 일어나지 않았다. 불러 봐도 대답이 없다.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거기에 엄마가 자고 있었다. 몸을 흔들어보니 차디차다. 엄마는 죽은 것이다. 그 집 울타리에는 이름모를 찬란한 꽃이 피어 있었다. 나는 언젠가 엄마한테서 들은 이야기를 생각하고 얼른 그 꽃을 꺾어 가지고 방으로 들어왔다. 하얀 꽃을 엄마 얼굴에 갖다 놓고 "뼈야 살아라!"하고, 빨간 꽃을 가슴에 갖다 놓고 "피야 살아라!" 그랬더니 엄마는 자가다 깨듯이 눈을 떴다. 나는 엄마를 얼싸안았다. 엄마는 금시 학이 되어 날아갔다.
- 금아 피천득의 수필「꿈」에서 발췌. - p.850, 같은 책

비가 온다.
10월, 벌써 중순이다.
어쩐지 쓸쓸한 새벽이다.   
* 댓글을 읽거나 작성을 하려면 로그인을 해야 합니다.

Total 392건 23 페이지
설(舌) 목록
번호 제목 날짜
62 탱자가 쉬는 김에, 2 ??.03.04
61 <추노> 13회 엔딩 2 ??.02.18
60 뒤늦게 2 ??.02.17
59 언년이 욕하지 마세요~ 9 ??.02.06
58 이번 주부턴 안 볼 테다 6 ??.01.11
57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 2 ??.01.06
56 그 남자는 왜 산에서 내려오지 못했을까 4 ??.12.31
55 취향의 차이...겠지만서도 7 ??.12.29
54 완전 좌절 3 ??.12.15
53 [비밀글] 진짜 가짜 - 학력 위조 세태에 덧붙여 1 ??.12.07
52 유통기한 <더 리더> 3 ??.11.28
10월, 가을비, 해럴드블룸 클래식 3 ??.10.14
50 '<토지> 정본 작업' 기사를 읽고 (한겨레) 2 ??.05.07
49 『멋진징조들』 한정 재간 4 ??.04.28
48 노래하는 태봉씨 7 ??.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