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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舌)
- 네 언어의 한계는 곧 네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by Ludwig Wittgenstein
5453 bytes / 조회: 918 / ????.11.01 01:27
이름 없는 괴물


늘 제 입으로 떠들고 다니지만 전 실제로 부끄럼 많은 외향적소심형입니다. 그러니 열린 공간에서 글을 쓰고 그것을 매개로 모르는 사람과 소통을 하는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제겐 결코 쉽지 않은 낯선 경험이지만 하지만 적응을 잘한다는 장점 덕에 어느새 익숙한 모습으로 매일 매일 그것을 해내고 있는 셈입니다.
실토하자면 현실 세계에서와 달리 소심함보다 외향성이 좀 더 강조되는 그런 생활을 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가끔 아주 가끔 그 간극 사이에 빠져서 고민할 때도 있어요.

‘관계를 맺을 때’ 저 역시도 ‘일반적인’ 의 분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요.
사람을 사귀는데 몇 단계를 거칩니다.
누구에겐 생략되는 단계가 필요하기도 하고 또 누구에겐 반드시 필요한 단계가 생략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단계라는 것도 오프-라인이 아닌 온-라인이 되고 보니 어쩔 수 없는 차이가 발생합니다.
좀 더 설명하자면 오프-라인에서 필요한 초입 단계가 온-라인에선 포기하고 넘어가는 식입니다.
그래서인지 오프-라인에선 쉬웠던 것이 온-라인에선 어렵고 또 그 반대의 경우가 생기기도 합니다.
그 중에서도 역시 가장 어렵고 미묘한 부분은 ‘타인을 이해시키는 것’인 것 같습니다.
제 경우 '소통(communication)'은 ‘이해’와 동일한 개념으로 받아들입니다.
어차피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유기적으로 소통하고 화학적으로 반응하면서 잘 돌아가고 있는데 아무렴 어떤가 싶기도 하지만...


어떤 옛날 어떤 곳에 이름 없는 괴물이 살았습니다.
괴물은 이름이 갖고 싶어서 너무나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괴물은 여행을 떠나, 이름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넓어서 괴물은 둘로 나눠서 여행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한 마리는 동쪽으로 또 한 마리는 서쪽으로.
동쪽으로 간 괴물은 마을을 발견했어요.

“대장장이 아저씨, 나에게 당신의 이름을 주세요.”
“이름을 어떻게 줘?”
“이름을 주면 내가 아저씨 속에 들어가서 힘을 세게 해드릴게요.”
“정말이냐? 힘이 세진다면 이름을 주겠다.”

괴물은 대장장이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대장장이 괴물은 오토가 되었습니다.
오토는 마을에서 가장 센 힘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나를 봐, 나를 봐라 내 안의 괴물이 이렇게 크게 자랐다.”

아드득 아드득 질겅질겅 와작와작 꿀꺽-
안에서 배가 고팠던 괴물은, 오토를 안에서 먹어치웠습니다.
괴물은 다시 이름 없는 괴물로 돌아가고 말았어요.
신발 가게의 한스 속으로 들어갔어도
아드득 아드득 질겅질겅 와작와작 꿀꺽-
또 이름 없는 괴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사냥꾼 토마스 속에 들어갔어도
아드득 아드득 질겅질겅 와작와작 꿀꺽-
역시 이름 없는 괴물로 돌아가고 말았어요.
괴물은 성안에서 멋진 이름을 찾기로 했습니다.

“네 이름을 나에게 주면 강해지게 해 줄게”
“병이 낫고 강해질 수 있다면, 이름을 줄게”

괴물은 사내 아이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사내 아이는 매우 건강해졌습니다.
임금님은 아주 기뻐했어요.

“왕자가 건강해졌구나. 왕자가 건강해졌어.”

괴물은 사내 아이의 이름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성안의 생활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배가 고파도 참았어요.
매일 매일 배가 고파도 참았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배가 고팠기 때문에,

“나를 봐 나를 봐 내 안의 괴물이 이렇게 크게 자랐어.”

사내 아이는 임금님도, 신하도 모두 잡아먹었습니다.
아드득 아드득 질겅질겅 와작와작 꿀꺽-
어느 날 사내 아이는 서쪽으로 갔던 괴물과 만났어요.

“이름을 찾았어. 멋진 이름이라고.”

서쪽으로 갔던 괴물은 말했습니다.

“너 같은 건 필요 없어. 이름 따윈 없어도 행복해. 우린 이름 없는 괴물이니까 말야.”

사내 아이는 서쪽으로 갔던 괴물을 잡아 먹고 말았어요.
모처럼 멋진 이름을 갖게 되었는데 아무도 불러줄 사람이 없게 되고 말았답니다.

- 우라사와 나오키 「몬스터」중 

언젠가 친구들과 모여서 떠들던 가운데 누군가가 던졌던,
“소주잔에 와인을 담으면 소주잔이 와인잔이 될까?”
라는 질문이 떠오릅니다.
질문자의 의도가 뭐였든 본질의 의미를 묻는 좋은 질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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