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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舌)
- 네 언어의 한계는 곧 네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by Ludwig Wittgenstein
12652 bytes / 조회: 3,073 / ????.06.03 20:52
두 소설의 유사성에 관한


* 제목이 너무 직접적인 것 같아 수정했습니다.


이미 알려질대로 알려진 내용이니 실명으로 표기합니다.
5월 말경에 표절 의혹이 불거졌는데, 간단하게 말하면 문정 작가의 신작 <현기증>(로맨스)이 쏘니 작가의 <더 데드 오브 윈터The dead of winter>(이하 '데오윈', 동인)을 표절했다는 것이 내용입니다.

<데오윈>은 동인지의 특성상 구하는 과정이 굉장히 힘들었지만 어찌어찌 구해서 읽었고, <현기증>은 구입을 해야하나 고민하던 차에, 어제 투표를 끝내고 동네에 딱 한 곳 있는 대여점에 갔더니 마침 입점이 되었길래 빌려 와서 읽고 짤막하게(?) 씁니다.
- 리뷰에 올릴까 하다 두 소설의 화제성을 감안, 이 곳에 올립니다.

<현기증>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소설은 10년 전(과거) 사건과 10년 후(현재)를 오가는데, 과거는 회상의 형태로 등장합니다.

10년 전, 신연수와 남민조는 미술 선생과 제자로 처음 만납니다. 이때 민조는 여자친구 혜민이 있는데도 연수에게 흔들리고(연수 역시 마찬가집니다), 결국 사실을 알게 된 혜민이 연수와 만난 직후 교통사고로 사망합니다. 이후 연수는 개인적인 비극을 겪으면서(부모님 사망, 사업에 실패한 오빠의 잠적, 혜민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 등) 폐인과 다름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나마 연수의 삶을 지탱해준 것은 죽은 혜민을 꼭 닮은 현지(연수가 후원하는 고아)와 그림을 그리는 일뿐입니다.

10년 후, 미술 학원에서 강사로 일하는 연수는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선미디어 공모전에 출품했던 그림이 입상했다는 연락을 받습니다. 그리고 수상자 자격으로 찾아간 선미디어에서 민조와 10년 만에 재회합니다. 민조는 연수에게 혜민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다그치고, 연수는 민조의 용서를 받고자 민조의 육체적, 정신적 학대를 저항 없이 받아들입니다. 그 와중에 연수가 출품한 그림에 반한 큐레이터 오진호가 나타납니다. 진호는 처음엔 연수의 그림에, 이어 연수에게 반합니다. 한편 진호의 존재에 질투와 위기감을 느낀 민조는 연수를 자신의 집에 데려오는데 그 과정에서 혜민과 닮은 현지의 존재를 알게 됩니다. 결국 민조에게서 도망친 연수는 혜민의 납골함 앞에서 정순(혜민모)를 만나 10년 전 일을 털어 놓고 용서를 비는데, 정순에게서 민조가 이미 진실을 털어놓고 용서를 빌었다는 얘기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민조에게 돌아온 연수는 민조와 갈등을 풀고 해피엔딩을 맞습니다. - <현기증>, 문정 

일단 <현기증>에서 가장 눈에 띄는 문제점은 개연성 부재로 보입니다.
10년만에 재회한 연수와 민조 사이에 암묵적으로 합의되는 지배-피지배 관계가 설득력을 얻으려면 10년 전 사건에서 연수가 가해자이고 민조가 피해자인 것에 대한 배경이 충분히 예시되어야 됩니다. 즉 과거에 연수와 민조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구체적인 에피소드를 보여 주고, 당시 두 사람의 감정선에 대한 서술이 선행되어야지만 과거가 현재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에 대한 개연성이 확보되는 거지요. 그런데 소설에선 이 부분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단지 연수가 민조를 좋아했고, 민조 역시 연수를 좋아했고, 그 사실을 혜민이 알게 되고. 이후 연수와 만난 직후 혜민이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이렇게 단편적으로 등장하는 정황만으로는 가해자와 피해자로, 지배자와 피지배자로서의 연수와 민조의 구조에 대한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연수와 민조에게 과거의 사건은 단지 불행한 사고였고, 두 사람 모두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 부분에 대한 개연성은 <데오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0년 전, 모교에 미술 교생으로 부임한 장인환은 커밍아웃 전인 호모섹슈얼입니다. 그리고 인환은 학교에서 우연히 맞닥뜨린 위에게 한 눈에 반하게 됩니다. 인환은 위의 주변을 돌던 중 위가 경제적인 이유로 부적절한 알바를 하고 있는 걸 알게 되고, 위의 고객 중 한 명이 자신의 선배인 걸 알게 되지요. 이런 식으로 인연이 겹치면서 결국 인환은 위의 경제적인 약점을 이용하여 위의 고객이 되는 것에 성공합니다. 다만 인환에게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일생의 사랑이었고, 헤테로섹슈얼인 위는 인환을 그저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단(이후 우정으로 진전합니다)으로만 받아들이는데, 이 차이가 그들 비극의 시작이 됩니다.
위의 경제적인 약점을 이용해 억지로 자신의 곁에 옭아매려던 인환의 집착과 광기는 결국 두 사람에게 많은 희생을 치르게 합니다. 위는 약혼자의 유산과 여동생 혜윤이 교통사고로 코마에 빠지는 아픔을 겪고, 인환은 아버지의 죽음과 그에 이어진 집안의 몰락, 2년여에 걸친 감옥 생활(살인미수), 수감 중 어머니의 죽음을 겪게 되는 것이지요.
인환이 감옥에 갇히면서 비로소 헤어진 두 사람은 10년 후, 인환이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화랑 주최의 공모전에 출품한 그림이 입상하면서 재회하게 됩니다. 다시 만난 두 사람의 역학적인 관계는 10년 전과 완전히 뒤바뀌어 있는데, 위는 경제적으로 정점에 서 있고 인환은 경제적으로 완전히 나락에 떨어져 있습니다. 자신의 욕심 때문에 10년 전 위를 치욕스런 스캔들에 휘말리게 한 것에 깊은 죄책감을 가지고 있던 인환은 위의 곁에서 정신적, 육체적 학대를 저항 없이 고스란히 받아들입니다. - <데드 오브 윈터>, 쏘니 

<현기증>에서 민조는 화랑에서 10년 만에 재회한 연수를 집까지 바래다 주면서 그대로 집안으로 따라 들어와 연수를 성폭행하는데, 두 사람이 겪은 과거 사건을 감안해도 민조의 이런 행위는 무척이나 돌발적이고 뜬금이 없습니다. 그런만큼 민조의 행위를 저항없이 받아들이는 연수의 무조건적인 심리도 물론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데오윈>을 참고하면 이 부분에 대한 의문이 풀립니다.
10년만에 화랑에서 재회한 인환을 바래다 준 위가 인환의 집으로 따라 들어와 인환을 성폭행합니다. 그런데 인환에겐 과거에 비록 거래였다고는 하나 위의 경제적인 약점을 이용해 반강제적으로 위와 육체적인 관계를 지속한 전력이 있습니다. 결국 그로 인해 비극이 발생했고 그 일은 위에게나 인환에게나 일종의 부채 의식을 남기게 됩니다. 이러한 배경이 재회 직후 위가 인환을 성적으로 유린하고 이후 인환을 학대하는 내용에 개연성을 실어주는 것이지요. (감. 이러한 전개가 옳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에요;;;)

인물 구도 역시 설득력이 많이 부족합니다.
<현기증>의 진호-연수 관계는 여러모로 납득이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능력있는 큐레이터 진호는 연수의 그림과 연수에게 첫 눈에 반해 깊은 사랑을 느낍니다. 그런데 연수를 향한 진호의 즉각적이고 갑작스런 열정은 공감을 불러 일으키기 보다 의문이 더 많이 듭니다. 소설에 의하면 진호가 연수의 그림에 반한 것은 단지 화풍이 보기 드물게 강력하다는 것이 이유이고, 또 연수에게 반하는 것은 그저 연수가 이렇게 말하니 귀엽고, 저렇게 행동하니 사랑스럽다 정도에 머물고 있습니다. 물론 첫 눈에 반하는데 이유가 있을리 없습니다만 소설 전체에서 진호의 존재감과 진호의 역할이 엇박자를 이루는 것은 분명합니다.
<데오윈>의 강원-인환의 경우는 관계 구도가 한층 명확합니다. 능력있는 큐레이터 강원은 인환의 출품작을 보는 순간 충격과 함께 강렬한 인상을 받습니다. 바이섹슈얼인 강원이 인환의 그림에서 호모섹슈얼자가 자신의 성정체성이 불러일으킨 비극으로 인해 깊은 상처를 입은 영혼을 본 것이지요. 강원은 인환의 영혼에 반하고 상처 입은 인환의 영혼을 구하고자 합니다. 오랫동안 자신을 스스로 고립시켰던 인환이 강원에게만 마음을 여는 것도 강원이 자신의 그림, 즉 자신의 영혼의 상처를 이해해주었기 때문이지요.

이외 소소하게 눈에 띄는 것 중 연수의 손에 대한 묘사를 보면,
<현기증> 내용 중에는 연수의 손을 본 진호가 '화가의 손 치고는 꽤 거칠다'고 생각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간의 고생을 암시하는)'동네 미술학원의 강사'와 연수의 손이 거칠다는 묘사 사이엔 별다른 인과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쉽게 말하면 연수 손에 대한 묘사는 있으나 마나한 사족인 셈입니다.
반면 <데오윈>에 등장하는 인환의 거친 손에 대한 묘사는 10년을 전후로 완전히 뒤바뀐 인환의 재정 상태를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부잣집 도련님이었던 과거와 달리 현재의 인환은 먹고 살기 위해 정비소에서 차량 정비 기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즉 '화가 답지 않게 거친 손'에 대한 개연성을 확보한 것이지요.

한 가지 더. <현기증>의 연수와 <데오윈>의 인환은 기면증을 연상하게 할 정도로 자주 잠에 취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연수의 경우 그 배경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기 때문에 좀 뜬금 없이 느껴지는 반면, 인환의 경우는 심한 우울증으로 병원에서 처방받은 우울증 약을 복용하는 배경이 소설 초반에 미리 등장하기 때문에 인물의 행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갈등이 모두 끝난 소설 종반에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하나였던 손가락은 이내 두 개로 늘어났고 얼마 후엔 다시 세 개로 늘어났다. 여린 몸이 상처입지 않도록 차근차근 풀어주던 손가락이 모두 빠져나가자 연수의 몸이 축 늘어졌다. - p.377,<현기증> 

표절 논란과 별개로, 이 장면은 작가에게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혹 동인 소설을 읽어 보신 분은 아마 눈치채셨겠지만 이는 행위의 당사자가 남성-남성의 구조일 때 등장하는 가장 흔하고 일반적인 장면입니다. 이 장면에서 직접적으로 묘사가 드러났을 뿐 사실 소설 전반에 걸쳐 연수는 여러모로 동인소설의 수(여자 역할)와 닮아 있습니다. 연수가 민조를 대할 때 여자가 남자를 대하는 것이 아니라 수가 공(남자 역할)을 대하는 것 같은 기시감을 불러 일으키는 장면이 좀 있는데, 물론 작가가 동인에 발을 담갔던 경력이 있고 그래서 은연중에 습관이 남았을 수는 있으나 동인과 로맨스는 장르의 성격이 분명 다르므로 이런 부분은 작가를 위해서도 개선되어져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작가의 다른 소설은 읽어 보지 않았으므로 이 부분은 <현기증>에 국한되는 얘깁니다)


이번 '표절 논란'에 대한 상세한 과정은 럽펜이나 혹은, http://plagiarism.tistory.com 에서 보실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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