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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舌)
- 네 언어의 한계는 곧 네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by Ludwig Wittgenstein
4763 bytes / 조회: 868 / ????.05.24 10:39
연애 시대 / SBS


요즘 드라마의 공통점. 반복되는 스테레오 타입화로 캐릭터가 힘을 잃었고, (염불보다 잿밥에 더 관심이 많은) 이야기는 설득력이 없다. 그래서 재미가 없다. 재미없는 뮤직드라마를 보는 기분, 딱 그거다.
간만에 재미있게 본 드라마 '연애 시대'가 종영했다.

마지막 회.
지호(은호의 여동생)의 자작극으로 춘천 가는 밤기차에 동행하게 된 동진과 은호.
동진과 은호는 서로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깨닫지만 동진은 이미 그의 첫사랑과 재혼한 유부남이다. 동진은 시간이 흐른 먼 훗날에도 여전히 지금과 똑같은 후회를 하며 살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 끔찍하다. 그리고 은호는 동진을 놓아줘야 한다는 마음과 동진 없이는 안 될 것 같다는 마음 사이에서 갈등한다.

마지막 회분에서 내 관심을 끌었던 인물은 동진의 아내, '유경'이다.
유경은 동진의 친구로부터 모든 이야기를 전해 듣지만 침착하다. 그 이유를, 어떤 일과 맞닥뜨렸을 때 왠지 "3자의 인물이 되어 그것을 보게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미처 반납하지 못 한 비디오 테입(메디슨 카운티의 다리)과 편지 한 장을 남겨놓고 동진을 떠난다. 동진이 자기에게 돌아올 지도 모르지만 자기 옆에서 계속 "행복하니?"라고 묻는 동진을 볼 것이 유경은 두렵다고 했다.

영화 <순수의 시대>와 <닥터 지바고>를 보면 공통적으로 아내 혹은 정혼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는 남자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결국 사랑하는 여자와 맺어지지 못 하는데 바로 그들의 '아내', 혹은 '정혼녀'를 버리지 못해서이다. 그들의 '아내' 혹은 '정혼녀'는 자신의 남자가 다른 여자와 불같은 사랑에 빠진 걸 알면서도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유일한 '대처'는 그저 모른 척 하는 것. 그리고 보통보다 조금 더 도덕적이고 규범적이고, 조금 덜 위악적인 남자들은 그런 아내를 버리지 못한다. 비록 배신은 하지만 아내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 동진은 어떨까.
동진은 드라마 내내 시종일관 정이 많고 적당히 책임감도 강하지만 우유부단하고 소심한 인물로 나온다. 드라마의 전반부에 이혼녀 미연(은호의 친구이자 은솔이라는 딸아이가 있는)이 등장하는데 이 때 역시 관계를 정리한 것은 동진이 아니라 미연이었다. 은호를 잊지 못 하는 그를 위해 먼저 조용히 떠난 유경처럼. 그들은 동진이 악역을 맡는 것이 싫은 사람들처럼 모두 최대한 쿨하게, 조용하게 떠나주는 것이다.
그래서 궁금하다. 유경이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여전히 착한 아내로 그의 옆에 남았다면 동진은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혹은 미연이 딸 은솔을 내세워 그를 끝까지 붙잡았다면? 동진은 역시 위에 언급한 영화속 남자 주인공과 같은 결정을 내렸을까. 아니면 그 때까지 보여줬던 그의 캐릭터를 깨고 과연 반전을 이루었을까...

은호가 탄 기차를 쫓아갈 때 동진은 '변명조차 떠오르지 않는 순간이 있다'는 독백을 한다. 아마 이것이 동진의 가장 정직한 진심이 아니었을까. 내가 본 '연애시대'의 미덕은 여기에 있다. 바로, 동진이 되돌아가는 것.
이미 돌이키기 힘든 곳까지 갔음에도 길을 잘 못 든 것을 깨닫는 순간 다시 되돌아간다는, 일견 쉽고 간단해 보이지만 막상 이 '당연한 결심'은 누구나 할 수 없는 '대단한 용기'이다. 내내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연애'를 보여 주던 ('드라마'로서의 허용을 감안) <연애시대>가 마지막에 '연애의 판타지'를 시청자들에게 선물한 셈.

은호의 내래이션처럼 그들의 끝이 해피엔딩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5년 후 아이와 함께 공원에서 쉬고 있는 은호와 동진은 분명 행복해 보인다.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할 때, 잃는 것을 두려워하기 보다 얻는 것에 용감해진다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행복한 인생'을 꿈꿀 것인가, '아름다운 인생'을 꿈꿀 것인가. 그것은 각자의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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