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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舌)
- 네 언어의 한계는 곧 네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by Ludwig Wittgenstein
9458 bytes / 조회: 833 / ????.06.30 11:12
창작의 자유와 표현의 한계 그리고 그 경계


끊임없는 창작의 자유와 그에 대한 논란을 보다가...

어제 TV 케이블 채널에서 (아마 <말죽거리 잔혹사>였던 것 같은데) 사이먼&가펑클의 <Mrs.Robinson>이 나오는 걸 무심코 듣다가 <졸업>이라는 영화가 떠올랐습니다. 더스틴 호프만 주연의 이 영화에서 이웃집에 사는 중년 여성의 이름이 바로 로빈슨이었죠. 잘 알려진대로 Mrs.Robinson은 이 영화의 ost입니다.
영화 <졸업>이 국내에서 상영될 때(저는 시간이 좀 지난 후 비디오로 봤지만 아마 재개봉이었던 걸로 기억) 영화를 본 이모들이 분개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로빈슨 부인이 글쎄 극중 여자주인공의 이모로 자막 처리된 것입니다. 사실은 이모가 아니라 여자주인공의 엄마였는데도. 여자주인공의 입은 ‘엄마’라고 하는데 자막은 ‘이모’라고 하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지금도 간혹 웃기는 코메디를 연출하는) 검열 기관으로서는 모녀가 한 남자와 관계를 맺는다는 설정이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거라는 짐작이 들긴 합니다만 <올드 보이>가 극장가에서 당당히 흥행하고 해외 유수 영화제에서 상을 받고 또 세계적인 영화 시장인 헐리우드에서 리메이크까지 앞두고 있는 현재를 사는 제 눈에도 부모님 세대의 말로 ‘요즘 세상 참 많이 좋아졌다’ 싶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깐 ‘텍스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롤랑 바르트의 ‘텍스트의 즐거움’에 의하면 텍스트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읽혀지는 텍스트’와 ‘쓰여지는 텍스트’로,
‘읽혀지는 텍스트’는 텍스트와 독자의 관계가 ‘텍스트->독자’ 로 이루어지며 그 과정에서 독자는 그저 텍스트로부터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즉, 독자는 소비하기만 하면 됩니다.
‘쓰여지는 텍스트’는 ‘텍스트<->독자’로서 독자는 텍스트를 읽는 중에 지속적인 자극을 받음으로서 텍스트의 내용을 확대 재생산하게 됩니다.
더 간단하게 정리하면 ‘읽혀지는 텍스트’는 ‘수렴’하는, ‘쓰여지는 텍스트’는 ‘수렴과 발산’을 함께 거친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드라마 <하늘이시여>를 예로 들어 보면,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라는 <하늘이시여>는 얘기하자면 위 두 분류 중에 ‘읽혀지는’ 것에 해당할 것입니다.
높은 시청률의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시청자들이 작가의 이야기를 지지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늘이시여>의 경우 같은 작가의 <보고 또 보고> 때부터 계속해서 반복되는 설정과 캐릭터, 이야기 구조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 드라마를 재미있게 시청하는 건 한 마디로 이야기 전체가 ‘권선징악’의 구조를 그대로 따라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서고금을 통해 누구나 인정하는 가치인  ‘권성징악’이 펼쳐지는 드라마를, 시청자들은 윤리적인 책임에서 벗어나 편안하게 드라마속 악역들을 ‘욕하면서’ 보면 되는 겁니다. 온갖 지리멸렬하고 잡다한 과정은 마지막에 느낄 카타르시스를 위해서 그저 거쳐야 할 관문일 뿐이고, 예쁘고 착한 여자 주인공을 악녀들의 손아귀에서 구출해냈다는 그 이유 하나로 극중에서 보란 듯이 행해지는 각종 ‘패륜’은 선이 악을 이기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는 식의 자가당착에 빠져듭니다.
즉 ‘패륜? 물론 나쁘지. 그렇지만 우리의 착한 주인공이 행복해지기만 한다면 받아들일 수있어.’ 라는 이율배반적인 논리가 드라마의 전반을 지배하고 또 그 시청자들까지도 그 논리에 자발적 혹은 비자발적으로 편승하게 되는 것인데, 같은 맥락에서 극중 배득(여자주인공의 양모이자 대표적인 악역)이 ‘내가 왜 나빠? 정말 나쁜 건 패륜을 저지른 그들 아냐?’라고 핏대를 세우며 절규하는 것을 보면서도 배득에게 공감을 못 느끼는 것은, 한 발 더 나아가, 나쁜 것! 아직도 니 죄를 모른단 말이냐!라고 욕하는 이 드라마는 재생산 없이 ‘그저’ 수렴하기만 하면 되는 텍스트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읽혀지는 텍스트와 쓰여지는 텍스트를 비교우위 개념으로 판단하는 것처럼 보여질 수도 있겠네요. 그런 건 아닙니다. 어느 쪽이든 동전의 양면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물론, 이 드라마를 사랑하는 애청자들의 경우가 그렇다는 것이고 실제로 이 드라마의 이런 면에 대해 우려를 하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이 드라마의 작가를 굉장히 영리하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만 얘기가 더 진행되면 시청률의 폐해까지 뻗어나갈 것 같으니 여기서 각설합니다.)

긴 글을 정리하자면,
그것이 드라마든 소설이든 영화든 음악이든 대중이 소비하는 창작물은 사회적인 순기능과 역기능 두 가지 측면에 대해 모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대중문화가 ‘도덕교과서’일 필요는 없겠지만 ‘범죄교과서’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요. 결국 창작하는 주체나 그 창작물을 소비하는 주체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보편적인 가치에 대한 고민인 것 같습니다. 물론 보편적인 것이 반드시 당위여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보편성’은 쉽게 정의를 내리기 힘든 논란이 많은 영역입니다. 그것은 시대와 사람과 상황에 따라 탄력적이고 유동적으로 변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반드시 지켜지고 보호받아야 할 보편적인 가치는 분명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기준으로 인간에게 보편적인 가치는 바로 ‘인간’입니다.
처음에 언급했던 <졸업>이라는 영화는 그저 귀향한 한 명문대 졸업생 청년이 이웃집 모녀와 사랑을 나누는 성애 얘기가 아닙니다. 만약 그랬다면 이 영화는 지금쯤 잊혀진 채로 어느 외진 비디오 가게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60년대의 미국 사회 중산층의 비틀린 특권 의식을 비꼬는 이 영화는 오늘날까지도 명화로 기억되고 있고 또 얼마 전에는 현대적인 각색을 거쳐 리메이크 되기도 했습니다.

표현의 자유, 창작의 자유. 굉장히 좋은 말입니다. 대중문화의 능동적, 자발적 소비자인 입장에서 제 개인적인 생각은 창작의 영역에 외부가 물리적으로 개입하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다만 그 창작물이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잊지만 않는다면... 이라는 단서를 달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저는 영화 <친구>를 재미있게 봤습니다. 나중에 ‘폭력 미화’라는 비난을 많이 받았던 영화였지만 지금도 영화 전반을 흐르는 진짜 얘기는 폭력 보다는 인간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영화의 말미에서 아직 어린 소년이었던 시절의 네 사람이 튜브하나에 매달려서 바다 한 가운데에 떠 있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들 중 한 아이가 “너무 멀리 왔다. 이제 그만 돌아가자.”라는 대사를 합니다. 성장한 그들의 비극을 모두 봐 버린 이후여서 더 그랬을 지도 모르지만 그 대사가 참 많이 가슴이 아팠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어쨌든 이 영화의 성공 이후 영화의 일부 장면에서 비롯된 사회적인 부작용이 꽤 있었습니다.
결국 대중문화를 접했을 때 그 속에서 무엇을 보는가, 무엇을 발견하는가 하는 건 개인의 문제겠지만 공급자든 수요자든 그 책임은 같이 져야 하는 공동체임은 부정할 수 없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지극히 개인적인 뱀발인데, 고백을 하자면 제 경우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같은 논란을 보면서 새로울 것 없는 논란 자체보다는 논란을 통해 드러나는 이중적인 잣대가 더 흥미롭습니다. 이중적인 잣대는 사실 공동체 사회에서 굉장히 위험한 발상입니다.
TV 뉴스에서, 신문에서 ‘사회범죄’를 접할 때 분노하던 사람들이 그것을 소설이나 영화로, 좀 더 확대해서 노래 가사로 접할 때는 전혀 다른 반응(관대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참으로 재미있는 현상입니다. 그것이 현실일 때는 피해 대상인 불특정 다수에 ‘내’가 포함될 수 있기 때문이고, 가상일 때는 그저 관음의 도구에 지나지 않아서 일까요? 그렇다면 정말 굉장한 자기애가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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