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독의 즐거움 <서재 결혼시키기> 外 > 설(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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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e's Cask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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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舌)
- 네 언어의 한계는 곧 네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by Ludwig Wittgenstein
5925 bytes / 조회: 802 / ????.09.25 21:59
낭독의 즐거움 <서재 결혼시키기> 外


찰스 디킨스가 세인트 제임스 홀의 만원을 이룬 청중 앞에서 ‘올리버 트위스트’를 큰 소리로 낭독했을 때 그의 심장 박동은 72에서 124까지 치솟았다. 당연한 일이다. 우선 그는 페이긴이 되었다. 측면에 날개처럼 붙은 청중석에서 지켜보고 있던 그의 친구 찰스 켄트는 그 몇 분간 디킨스가 “악마의 화신” 같았다고 전한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졌으며, 차양을 친 듯한 눈썹은 무시무시한 파충류의 더듬이처럼 움직였고, 반쯤은 여우같기도 하고 반쯤은 독수리 같기도 한 그의 모습 전체가 굶주린 맹수처럼 사악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파충류, 포유류, 조류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려면 누구라도 맥박이 빨라졌을 것이다.) 이어 디킨스는 책의 여백에 써놓은 무대 지시 사항(“몸을 부르르 떤다… 공포에 질려 주위를 돌아본다… 살인이 다가온다.”)을 흘끗 본 뒤에, 빌 사이크스가 되어 눈에 보이지 않는 몽둥이를 휘둘렀다. 마지막으로 그는 낸시가 되어 숨을 헐떡였다. “빌, 오, 빌.” 그녀는 자신의 피 때문에 앞을 보지 못한 채 바닥에 쓰러졌다. 디킨스는 낸시를 몽둥이로 때리고 사이크스의 목을 매단 뒤에는 무대 밖의 소파에 엎어져 10분 동안 말을 제대로 이어 나가지도 못했다고 한다. - p.147. 낭독의 쾌감

앤 패디먼의 에세이인 ‘서재 결혼 시키기’의 미덕은, 같은 활자중독자로서 작가에게서 유사한 경험을 발견하고 공유하는 데서 오는 재미라고 할 수 있겠다.

영화『카포티』에도 낭독 장면이 등장한다.
(2005년 아카데미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카포티(capote)>의 종반부쯤에 가면 바로 이 ‘낭독’하는 장면이 나온다. 트루먼 카포티는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원작자이자 시나리오 작업을 했던 작가로, 당시엔 출판 전후에 홍보를 겸한 자신의 책을 낭독하는 행사가 일상적이었던 모양이다.
<카포티>는 최초의 팩션이라고 일컬어지는 트루먼 카포티의 저널리즘 소설 <In cold blood(냉혈한)>를 쓰는 과정을 다룬 영화로, 1959년 평화로운 한 시골 마을에서 고작 ‘푼돈’ 때문에 한 일가족이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직후 곧 체포된 이 사건의 1급 살인범과 소설의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문제의 살인범을 면회하는 카포티를 다루고 있다. 영화 속에서 누군가가 카포티에게 ‘제목인 냉혈한은 살인범을 가리키는 말인가, 작가를 가리키는 말인가?’라고 묻는 대사는 매우 적절하다. 살인범은 동정의 여지가 없는 나쁜 놈이고, 카포티는 자신의 소설에만 관심 있는 더 할 수 없이 이기적인 인물이기 때문.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수형이 집행되는 장면에 이르면 이 두 사람의 모습에 투영된 사형 제도에 대해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는 점이다. 주인공 카포티役을 맡은(그리고 <미션 임파서블 3>에서 악당으로 등장하기도 했던)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은 이 영화에서 정말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해외 배우의 경우, 못 하는 연기는 구분이 힘들지만 잘 하는 연기는 확실히 보인다.

‘낭독’에 대한 부분은 온다 리쿠의 장편 <삼월은 붉은 구렁을>의 4장에서도 잠깐 언급되는데, 작가는 ‘읽는 책’이 ‘보는 책’이 된 디지털 세대인 지금의 다음 세대쯤에 이르면 아마 다시 ‘듣는 낭독’의 시대가 오지 않을까, 라고 자신의 견해를 살짝 내비치기도 했다.

나도 이 ‘낭독’을 할 때가 가끔 있는데 주로 가족이나 친한 친구들에게 한다. 대부분 책을 읽고 너무 좋아서, 혹은 반대로 너무 싫어서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입 밖으로 쏟아내고 싶은 욕구를 도저히 참기 어려울 때 주로 낭독을 하는데 내 낭독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재미있어 하던 친구가 유학을 간 후로, 지금은 M군이 내 낭독의 대상을 도맡아 한다. 처음엔 수화기를 붙들고 M군에게 그 책을 꼭 읽어보라고 몇 번이고 강조하다가 급기야 M군이 ‘문제의 책’을 읽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는 내 성급함이 전화선을 타고 ‘낭독’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M군, 처음엔 잘 들어주는 것 같더니 차츰 귀찮아하다가 나중엔 들어주는 척만 하다가, ‘척’하면 한 번 들을 걸 두 번 듣게 된다는 걸 경험한 후에는 이젠 제법 성의있게 들어주고 촌평도 해준다.(하지만 여전히 귀찮아한다.)

여기에서 필연적으로 하게 되는 고민은 내가 낭독자로서 얼마나 객관적으로 작가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인데, 사실 내가 상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인간이다 보니 ‘낭독’하기에 이르면 스스로 알아서 딜레마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니 ‘낭독’ 전에 자연히 사설이 길어지게 되고, 전화기 저쪽에서 내 이런 사설을 인내심 있게 들어주던 M군은 결국 못 참고 한 마디 한다. “다 감안해서 들으니까 그냥 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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