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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22 14:36
태백산맥 1권中
그녀는 너무 졸려서 조용히 굿판을 빠져 마당으로 나왔다. 안개 같은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그녀는 마당가의 채송화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채송화 꽃잎을 손톱 위에 잉끄리며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야아.」퉁명스러운 남자애 목소리에 그녀는 발딱 일어섰다. 하섭이라는 이름의 그 집 아들이 우뚝 서 있었다. 그런데 그가 내밀고 있는 손바닥 위에는 황금빛으로 익은 비파가 두 개 놓여 있었다. 그녀는 어찌 할 줄을 몰라 그의 눈만 빠끔 쳐다보았다.「니 묵어라.」 남자애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녀는 사양할 수조차 없는 위압을 느꼈다. 그녀는 숨이 멎는 것 같은 답답함을 느끼며 간신히 손을 뻗쳐 비파 한 개를 집어들었다.「두 개 다 묵어라.」남자애가 말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도리질을 했다.「둘 다 묵으랑께.」남자애는 좀더 큰 소리로 말했다. 그녀도 좀더 세개 도리질을 했다. 그러자 남자애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비파를 든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곧 땅바닥에 내팽개칠 기세였다.「아녀, 나랑 항께 하나씩 묵잔 것이여.」그녀는 얼결에 남자애의 팔을 붙들며 울먹였다. 남자애의 일그러졌던 얼굴에 금방 웃음기가 퍼졌고, 그녀는 남자애의 팔을 후다닥 놓았다.「껍질은 못 묵는 거다.」남자애는 그렇게 말하며 먹는 법을 가르쳐주듯 비파의 껍질을 벗겼다. 비파는 딱 한입에 찼고, 그 달고 연한 맛은 뭐라고 형용할 수가 없었다. 그런 맛있는 열매를 장독대에 있는 나무에서 마음대로 따먹을 수 있는 남자애가 더없이 부러웠다.「니같이 이뿐 애가 워째 무당이 됐는지 몰르겄다.」남자애는 불쑥 말하고는 비파 껍질을 담장 너머 어둠 속으로 내던졌다. 그녀는 그 말에 가슴을 치고 지나가는 아픔을 느꼈다. 눈물이 울컥 솟아올랐다. 그녀는 마당을 가로질러 바라 소리가 친친 얽혀 감기고 있는 대청을 향해 뛰었다. 그녀는 그후로 그의 집에서 벌이는 굿에는 한사코 가지를 않았다. 그녀가 열일곱의 나이로 대물림굿을 받게 되었을 때 남자애의 말은 달구어진 인두가 되어 그녀의 가슴을 지짐질해댔다.
- pp.26-27,『태백산맥 1』
- pp.26-27,『태백산맥 1』
* 故김현이 1-3권 중 가장 아름답다고 말한 장면이다. 역시 아름답다. 슬프기도 하고 애잔하기도 하고...
* 대하소설의 공통점은, 일단 재미있다는 것과 그리고 읽기 전까지의 상당한 권수에 대한 부담감이 읽기 시작하면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대하소설을 시작하는 것은 쉽지 않다.
* 결론은 대하소설은 몰아치듯 한 번에 읽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다행히 '고전'이다 싶은 국내 대하소설은 손에 꼽을 정도니 도전해 볼만 하다. 그것을 과연 다행이라고 해야 할 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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