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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舌)
- 네 언어의 한계는 곧 네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by Ludwig Wittgenstein
10585 bytes / 조회: 877 / ????.10.14 16:50
소설이 이렇게 쉬워도 괜찮은가


소설가들은 더 이상 세계를 통찰하고 독자를 유혹하는 선지자가 되기를 포기한 걸까? 이른바 잘 나간다는 김영하, 공지영, 이기호, 정이현, 박현욱 등의 소설을 읽고서 순결한 감동과 명철한 작가적 시선을 이야기하긴 정녕 어려운 걸까? 그들의 소설은 왜 그렇게 쉬운가?

문제는 문장에 있다. 언제부턴가 잘 읽히는 문장이란 짧고 단순한 서술, 상용화된 문형, 통념적인 이미지의 환기, 경구의 테를 두른 감상이나 무딘 예언 같은 게 됐다. 엄밀히 말하자면 단지 쉽고 통속할 뿐인 문장들이 가독성 높고 흡인력 있다는 칭찬을 듣게된 것이다. 농축된 비유, 문법요소의 정확한 활용, 정갈한 이미지의 전개같이 문장을 잘 읽히게 하는 실질적 요소들에 관한 고려와, 문장이 지적하는 구체적 사실에 대한 평가는 생략된 채. 문장은 작가가 본 세계를 담는 공간이다. 문장이 쉽다면 의당 문장이 담고 있는 세계가 쉬운 건 아닌지 의심해봐야 한다. "쉽고 잘 읽히는 문장으로 이루어진 소설의 열에 아홉은 세계를 너무 '쉽게' 그린다. 그리고 이런 작가들일수록, 별로 의미 없는 '보편적인 가치'라는 말을 떠벌린다. 변수나 함축 없는 문장이 모두에게 잘 통용되므로 보편이라는 거짓환상과 만나게 되는 것 같다"고 문학평론가 김예림은 말했다.

"끔찍했던 어떤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지는 것, 그런 일이 반복되는 것, 혹시 그런 게 인생이 아닐까" 같은 다소 감상적인 김영하의 아포리즘.(그가 <조선일보>에 연재하고 있는 <퀴즈쇼>는 이런 것들로 혼합 돼 있다.) "위선을 행한다는 것은 적어도 선한 게 뭔지 감은 잡고 있는 거야. 깊은 내면에서 그들은 자기들이 보여지는 것만큼 훌륭하지 못하다는 걸 알아…(중략)…내가 정말 싫어하는 사람은 위악을 떠는 사람들이야. 그들은 남에게 악한 짓을 하면서 실은 자기네들이 어느 정도는 선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에서 '위선'과 '위악'을 바꿔 넣어도 의미가 통하는 공지영의 모호하고도 '융통성 있는' 세계인식. 독백이나 묘사라기보다는 '나열'로 읽히는, 정이현이 쓴 <타인의 고독>의 서두. 새로운 화술을 개발할 뿐 새로운 진실을 탐색하는 데는 실패한다는 점에서 전작과 합본으로 묶어도 괜찮을 것 같은 이기호의 <갈팔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인용의 힘으로 서사를 이어나간다는 점에서 소설이라기보다는 에세이에 가까워 보이는 박현욱의 <아내가 결혼했다>. 그들의 문장은 너무 쉽다. 그들은 이미 서술된 세계에서 조금도 더 나아가지 않는다. 박약하고 위험한 것들을 찾고 탐구하지 않는다. 절실한 진실을 낡고 식상하게 만든다.

정이현은 지난 호 <GQ>와의 인터뷰에서 비록 문장의 힘이 떨어진다고 해도 "그들이 작가가 됐다는 건 그런 것을 상쇄할 만한 장점이 있다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소설이란 문장을 딛고 소설만이 닿을 수 있는 고도로 도약해야 하는 게 아닐까? 무감동하게 발성하는 가수도 가수고, 새로운 문장을 쓸 수 없는 소설가도 소설가라면, 소설가는 예술가가 아니라 차라리 엔테테이너가 아닐까?

소설가 김연수는 "이제 소설은 어떤 것이라고 단언할 수 없으며 소설의 개념에 예술성뿐만 아니라 상업성, 오락성 같은 다양한 속성이 존재한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소설이 잘 팔린다는 건 면죄부가 될 순 없다. <남한산성>에서의 김훈의 문장은 잘 읽히지만 쉽지는 않다. 한 문장을 김훈처럼 쓰는 건 쉬운 일일지 모르지만 한 문단을 김훈처럼 쓰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일 것이다. 조사의 사용은 분명하고 의미의 분절과 연결은 정확하며 이미지의 환기와 전환은 함축적이다. 진지하지만 난해하지 않고, 사실적이지만 어지럽지 않다.

소설은 소설적 완성도, 서사적 매력, 마케팅, 정신적 유행 등 다양한 동인으로 잘 팔린다. 판매량은 독자의 취향과 목적에 달린 문제이지 소설의 성질과는 무관한 일이다. 판매량, 비평, 사회적 함의, 정치적 입장 같은 당대의 어떤 잣대로 작품의 성질과 내적 정당성을 확고히 보증하지 못한다. 독자들은 서로 다른 이유로 그들의 혹은 그들중 하나의 작품을 샀을 뿐인 것이다. 따라서 소설의 정당성을 독자에게서 찾는 건 교활하고도 어리석은 일이다. 통찰의 부족함을 은폐하고 예술적 합리성을 혼동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까. 어떤 작품이 소설로서의 격과 중심, 곧 문학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진지함을 갖고 있지 않다면 소설의 개념을 건축한 신실하고 재능 있는 작품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일 뿐이다.

문학적 진지함은 전통 속에서만 찾을 수 있다. "작가는 동시대의 대중들이 아니라 앞 시대의 대가들에게(그러니까 이미 이 세상에 없는 대가들) 인정받을 수 있는 작품을 쓰는 작가들일 것이다. 아니면 니체처럼 300년 후엔 자신의 진정한 독자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호언할 수 있는 비극적 대담성이 필요하다." 문학평론가 정여울의 말이다. 가장 훌륭한 소설들만이 세월을 지나 여전히 읽힌다는 건 냉혹하고도 정확한 진실이다. 물론 전통이란 권위에 의해 교란될 수도 있다. 권세를 가진 자들만이 뭔가를 선택할 수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현대적'이라는 건, 어쩌면 당대의 부박함을 고백하는 서술일 수 있다. '마이'와 '이대팔' 가르마를 탄 장발이 가장 도회적일 때도 있었으니까.

전통과 현대성은 토끼뜀 하는 유행이나 차고 이우는 권좌가 아니라, 어떤 실존적 조건에 연결된 개념이다. 공전하는
시간 속에서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문제들 즉 지식의 한계, 더디고 불충분한 소통, 포기할 수 없는 정념, 시간의 유한함, 본질로서의 고통 같은 것들이 지금 현재의 세계 안에서 정련된 문장으로 개연성 있게 제기될 때비로소 가장 모던한 것이 전통이 되고, 가장 전통적인 것이 모던해지는 것 아닌가.

성경과 불경이 지금껏 읽히는 건 그 안의 견고한 언어가 여전히 사람들을 고통과 불안으로부터 구원하기 때문이다. 헤르만 헤세와 톨스토이와 나쓰메 소세키, 오에 겐자부로, 그리고 읽으면 깜짝 놀랄 이태준과 염상섭, 박상륭도 마찬가지다. 물론 전통의 해석은 온전히 작가의 몫이고 신념이다. 그리고 문학적 다양성의 원천은 작가의 해석이지 결코 전통 그 자체가 아니다. 문학적 깃발을 세우는 건 혁신이지 모방이 아니니까. 중요한 건 작가가 서야 할 곳이 유행의 첨단이 아니라 전통의 첨단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진정한 소설의 위기는 소설이 팔리지 않는 때를 가리키는 게 아니다. 소설이 소설 같지 않을 때야말로 소설의 위기인 것이다. 기실, 모든 소설이 필요하다는, 그러니까 만화 같은 소설도 있어야 하고 영화 같은 소설도 있어야 하고 연속극 같은 소설도 있어야 한다는 얘기는 흔하다. 일상성과 유머와 엽기를 소설에서 왜 다루어선 안 되는가, 왜 기존의 소설담론에 소설의 새로운 풍조를 함몰시키려 드는가라고 재우쳐 묻는 것도. 하지만 소설은 소설이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느다고 할 때 조차 무언가를 의미한다. 소설이 다른 무엇이 될 수도 있지 않느냐는 의문은 소설이 왜 소설이어야 하는지를 묻는, 근원적 질문을 회피하는 것에 불과하다. 문학적 진지함과 소설의 전통을 연결 짓는 건 소설이 소설적 전통 속에서만 비로소 완전하게 기능하기 때문이다. 위대하다면 위대한 대로, 하찮다면 하찮은 대로 어쨌든 문학은 문학으로서 존재해야 한다.

당대의 잘 팔리는 소설 혹은 평론가들이 주목하는 소설들은 분명 손색없이 잘 쓴 글일 터다. 하지만 소설을 읽는 게 지적인 허영 때문이라면 소설 대신, 시시각각 급변하는 문화적 유행상품을 민첩하게 소비하는 것이 더 폼 나고 효율적이다. 아무 생각 없는 심심파적을 위해서라면 PMP로 게임을 하는 게 훨씬 간편하고 뒤끝없다. 박진감 넘치는 플롯과 거듭되는 반전에 가슴이 뛴다면 <24>와 <LOST>를 봐야 한다. 그리고, 소설이 소설답지 않다면, 지난 신문처럼 한 번 읽고 문 밖에 내놔도 그만이다. 실제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니 누구더러 진정 50년 뒤에도 여전히 유효할, 헌 책방을 순례하게 만들 소설을 쓰는 작가라 할 것인가?

객원 에디터 / 이혁진
GQ 10월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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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도 문화적 다양성이 주는 혜택을 적극적으로 즐기고 누리는 나는 다양성 자체에 이의를 제기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양화가 악화를 구축한다던가. 다양성의 안전한 논리 뒤에 숨은 '쉬운 소설'의 유행은 (고전적 의미에서)소설적 서사에 탐닉하고 행간을 누비는 것을 즐기는 나같은 독자에겐 당장에 읽을 거리가 없어서 점점 선택의 폭이 좁아지는 불편함으로 되돌아온다. (국내로 국한시켰을때)아마 10년쯤 아니 어쩌면 5년쯤 뒤면 신간은 더 이상 읽을 게 없어서 옛 소설을 뒤적이고 있을 지도 모른다. 실제로 나는 요즘 문학과지성사의 우리시대 고전 목록을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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