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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舌)
- 네 언어의 한계는 곧 네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by Ludwig Wittgenstein
6048 bytes / 조회: 790 / ????.02.28 04:45
장르문화를 향한 팬심


* 주. 팬심 : fan+心

심형래 감독의 디워(D-War) 흥행을 두고 대한민국을 들었다 놨다 하던 갑론을박이 결국 한창 개봉 중인 영화를 TV토론의 주제에 올려놓는 '사건'으로 번졌다. 재미있는 것은 갑론을박의 주체. 바로 관객 vs 관객이 아니라 관객 vs 평론가(기자, 영화인 포함)의 구도가 돼버린 것이다.

갑론을박의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관객 vs 관객의 논쟁이 되면 '취향의 다양성'이 초점이 되지만, 관객 vs 평론가의 논쟁이 되면 '취향의 수준(혹은 질)'이 초점이 되기 때문. 즉 '영화'가 아니라 '내 취향'이 문제가 된다. 자신의 취향이 저급하다고 공격 당했다고 생각하는 관객은 즉각 평론가를 향해 오만과 편견에 사로잡힌 고루한 보수라고 공격하고, 평론가는 관객에게 상업적인 마케팅에 휘둘린 감상주의라고 반박한다. <100분 토론>은 이러한 대립의 절정을 보여준 현장이었다.
영화를 영화로만 즐기고 싶은 관객과, 영화를 영화로만 볼래도 그럴 수가 없는 평론가가 토론을 한다. 어째 영화보다 더 재미있고 흥미진진하다.
편성 자체가 코미디였던 이 토론의 주인공은, 패널 명단이 나왔을 때 다들 예상했듯이 누가 뭐래도 진중권 교수였다. 누구나 인정하는 말빨 쎈 진중권 교수는 그러나 지적인 무장을 단단히 하고 나왔음에도 결국 말이 안 통하는 상대를 향해 '꼭지가 돈다'고 폭발하고 만다.
디워 지지자는 주장한다. "재미있으면 됐지. 이건 예술영화가 아니라 괴수영화라고. 그래, 스토리는 좀 어설펐어. 그게 뭐? 용들이 전쟁을 벌이는 CG는 매우 훌륭했잖아. 그럼 된 거지."
사실 진 교수의 실수라면 장르문화를 지지하는 팬심을 단순한 문화적인 광기로 이해한 데 있다. 장르문화를 향한 팬심은 장르 그 자체보다는 장르를 즐기는 자신의 취향을 옹호하는 적극적인 방어다. 즉 타자가 보기에 일방적이고 광적으로까지 보이는 이해할 수 없는 충성심은 바로 자기애(愛)의 일부 표현이며, 이를 흔히들 하는 말로 '덕질'이라고 한다. 그러니 아쉬운 점은, 진 교수가 영화적인 텍스트가 심하게 부실한 디워를 학술적으로 비평하는 대신 B급 문화를 수용하고 열광하는 관객의 심리에 보다 단순하게 접근하는 유연성을 보였다면 토론의 양상이 다른 방향으로 흘렀을지도 모른다는 것.

어쨌든 진 교수는 B급 영화를 B급 공식으로 즐기고 싶은 대중에게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고 외침으로써 단번에 디워 팬들의 공적이 된다. 도대체가 예술영화도 아니고 상업영화 그것도 철저하게 장르의 공식에 맞춘 괴수영화에 외우기도 힘든 전문용어를 쓰니 대중은 화가 치민다. 

 

* 데우스 엑스 마키나 - 여기에선 '신화神話의 대표적인 속성인 판타지에 기댄 편리한 결말'이라는 제한된 의미로 사용되었다.

 

대중은 이제 머리가 아프기 시작한다. 要는, 대중은 그냥 즐기고 싶을 뿐이란 얘기. 그런데 외부인들이 내 취향에 감 놔라, 배 놔라 한다.

소설, 구체적으로 로맨스소설을 예로 들어 보자.
A가 정말 정말 '재미있게' 읽은 책을 B가 나서서 조목조목 '비평'한다. 이런 경우 '책'을 재미있게 읽은 몇몇의 A는 B의 비평이 감정적으로 기분 나쁘다. B가 꼭 잘난 척 하는 것만 같다. 예민한 몇몇의 A는 B의 조목조목 비평에 모욕을 당한 것 같은 기분까지 든다. 왜 그럴까?
흔히 하는 대화들을 보자.

A : 어제 만화책 우하하를 읽었는데 진짜 웃겼어.
B : 우하하 그거 유치하던데.
A : 좀 그런 면이 있기도 해.

(여기에서 그게 왜 유치해? 하고 반박하면 십중팔구 싸움이 된다)

혹은,

A : 만화책 엉엉엉을 읽었는데 진짜 슬펐어.
B : 그렇게 슬퍼?
A : 난 슬펐는데 넌 어쩌면 안 슬플지도 몰라.

 

두 대화의 공통점은, B의 반응에 따라 A의 태도가 방어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점.
책을 읽는 행위, 그러니까 독서는 인간이 하는 가장 쉽고 보편적인 지적(知的)활동인데 내가 재미있다, 감동적이다- 라고 했던 책을 누군가 재미도 없고 허점 투성이다 라고 말하면 몇몇 A에겐 자칫 그것이 책에 대한 평을 넘어서 자신의 지적수준을 폄하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즉 B가 책에 대해 요모조모 비평하면 몇몇의 A는 그 비평이 책을 넘어 자신을 향한 것인양 불편한 감정을 느끼는 것인데 이는 매우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내가 자랑해 마지 않던 남자 친구를 마침내 친구에게 소개시켰더니 친구 曰 "너 눈 삐었구나" 하면 열에 아홉은 불쾌감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
지인에게 식사를 대접할 일이 생겼다. 진짜 진짜 맛있는, 둘이 먹다 둘 다 죽어도 모를 만큼 맛있는 떡볶이 가게를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떡볶이 가게로 지인을 데리고 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지인이 내 수준을 떡볶이로 알까봐. 슬프지만 아무리 맛있어도 떡볶이는 떡볶이인 것이다.

취향은, 특히 장르문화 앞에 서면 취향은 소심해진다. 결론은 덕질이 소수의 매니악한 취향의 결정체인 건 숙명이라는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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