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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舌)
- 네 언어의 한계는 곧 네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by Ludwig Wittgenstein
5512 bytes / 조회: 835 / ????.05.20 18:43
진정성이 빠진 논픽션, '정혜윤의 독서기'


픽션과 논픽션의 가장 큰 차이점은 아무래도 '사실인가 허구인가'에 있을 것이다. 이 말을 달리 하면 쓰고자 하는 것이 논픽션일 때 저자는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는 의미가 되는데, 논픽션이란 진정성을 담보로 하는 '사실'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정혜윤은 재작년부터 한 해 걸러 한 권씩 두 권의 책, <침대와 책>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를 냈다. 둘 다 한동안 업계에서 유행했던 '책에 관한 책'으로 전자는 책 리뷰, 후자는 인터뷰라는 형식의 외형 안에 역시 그녀의 책 리뷰를 담았다.
그녀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의 진정성에 의문을 가지게 된 첫 계기는 첫 번째 책인 <침대와 책>이다. 어느 해 겨울, 나는 방콕에서 코사무이로 가는 방콕항공 비행기를 탔다. - p.005
그녀가 모 온라인서점 블로그에 연재를 시작했을 때, 처음에 등장했던 비행기는 다른 항공사였다. 해당 서점을 한창 들락날락할 때라 어쩌다 수정 전에 읽었는데 기억하기로 프랑크푸르트 항공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누군가 댓글로 지적한 후 그녀는 방콕 항공으로 수정한다. (출간된 책에도 물론 방콕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바로 뒷 장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처음 이 침대를 들여놓던 날, 잠들 때 잊지 않으려 중얼거렸던 문장은 백석의 문장이었다.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라는 시의 첫 구절을 기억하고 그 다음 날 거울에다 아름다운 나타샤가 나귀를 타는 장면을 분홍 립스틱으로 그려놓았다. - p.007 
일단 유감스럽지만, 저자가 인용한 구절은 첫 구절이 아니라 마지막(문단) 구절이다.
<침대와 책>이라는 제목을 보면 그녀에게 '침대'와 '책'은 분명 남다른 의미인 것 같다. 그리고 침대가 들어온 첫날 외던 것이라 하니 백석의 시(詩)역시 그녀에겐 남다른 의미인 거라 짐작된다. 그런데 왜 저런 오류가 생겨버린 것일까.
저자가 실수로 잘못 기억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특별한 날에 잊지 않으려고 외던 시라면 적어도 돌다리도 두들겨 보는 정도의 성실성 쯤은 가져야 하지 않을까. 게다가 하필 '분홍 립스틱'이라니, 왠지 설정의 향기가 풍긴다.
<침대와 책>은 이렇듯 그녀의 진정성을 의심케하는 부분이 종종 등장한다.

무엇보다도 난감한 것은 전체 226 페이지에 달하는 지면 중 적어도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인용이다. 저자 자신의 글보다 인용이 더 많은 책은 저자가 본문을 쓰기 위해 인용을 한 것인지, 인용을 하기 위해 본문을 쓴 것인지 헷갈린다. 인용과 본문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따로 노는 것을 보아도 그렇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a는 황금이라는 단어를 배운다. a는 새로 배운 단어를 써먹고 싶지만 좀처럼 기회가 안 온다. 그런데 마침 누군가 똥 얘기를 꺼낸다. a는 이때다 싶어 얼른 외친다. "너희들 황금이 노란색인 거 아니?"

어떤 일은 전(前)과 후(後)의 순서가 매우 중요하다. 인용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이건 곡을 먼저 만들고 가사를 쓰든, 가사를 먼저 쓰고 곡을 만들든 아무래도 상관없는 대중가요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인데 '인용이 먼저인가, 본문이 먼저인가'가 왜 중요한가 하니 자칫 저자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얘기하는 뛰어난 기술가' 가 아닌가 하는 의혹을 낳기 때문이다.

결코 좋았다고 할 수 없는 첫인상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두 번째 책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를 구입한 것은 책의 겉면을 풍성하게 채운 11인의 리스트 때문이었다. 11인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리스트는 저자의 첫인상쯤 간단하게 옆으로 치워버리도록 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그녀가 만난) 11인의 독서기' 겠거니 짐작했던 것과 달리 책은 그녀의 두 번째 독서기였다. 물론 여전히 넘쳐나는 인용은 양적으로 저자의 글을 압도한다. 뿐만 아니라 여전히 기름과 물처럼 섞이지 못하고 따로 떠돈다. 게다가 더없이 유혹적이던 11인은 그녀의 독서 인생을 되살리는 매개체보다는 그녀가 인용할 텍스트의 제공자로서의 역할이 더 주효한 것처럼 보인다.

저자가 영리한 것일까, 출판사의 기획력이 뛰어난 것일까. 그보단 서점에서 직접 확인하지 않은 나의 게으른 탓이 제일 크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 인용을 많이 하는 사람은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일까?
책을 덮고난 후에도 '그녀에' 의하면 여러모로 범상하지 않았던 그녀의 과거와 현재의 일상들이 과연 정말 범상하지 않았던 것인지, 아니면 단지 그녀가 꿈꾸는 방식대로의 비범인지 여전히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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