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타냥 너마저 『취미는 독서』外 > 설(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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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1
설(舌)
- 네 언어의 한계는 곧 네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by Ludwig Wittgenstein
10836 bytes / 조회: 878 / ????.08.12 00:06
달타냥 너마저 『취미는 독서』外


지금까지 소설이건 비소설이건 나를 박장대소하게 만든 일본인 저자의 책은『취미는 독서』가 유일했다. 출판사 마케터 출신인 저자가 쓴 글이니 당연하지만 책의 목차를 채운 건 대부분 일본내(1999-2001) 베스트셀러라 읽기 전까지 몹시 망설였지만 막상 읽기 시작한 이후 읽는 동안 내내, 그리고 다 읽고 책을 덮으면서도 내 입에서 나온 건 단 한마디, "아, 재미있다!"였다. 다음은 책을 읽다가 육성으로 웃고 말았던 한 대목.

 

며칠 전 시부야역 근처에서 야식을 먹고 있을 때 생긴 일이다. 옆자리에 대학생이나 전문대생쯤으로 보이는 남학생 둘이 앉았다. "셰익스피어가……"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허허, 요즘 시대에 보기 드문 젊은이들이군. 셰익스피어가 어쨌다고?
"……누구더라?"
셰익스피어가 누구더라! 라는 말만 들어도 콧구멍에서 밥알이 튀어나올 지경인데, 질문을 받은 학생이 놀라는 기색도 없이 대화가 이어졌다.
"글쎄. 들어본 이름인데…"
"유명인이라는데, 영 이미지가 안 떠오른단 말이야."
"그러네. 사진을 본 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야 그렇지. 누구인들 사진을 본 적이 있으랴.
아마도 그들은 개봉 중인 영화 <셰익스피어 인 러브>의 포스터를 본 게 아닐까(설마 영화를 보고나서 나누는 얘기는 아니겠지). - p.32『취미는 독서』 

덧붙이면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이웃나라 일본도 미국도 베스트셀러 기준이 백만 부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베스트셀러에 대한 저자의 정의가 명쾌한데, 이를테면 '100만 부 팔리는 책은 '평소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 사는 책이다.'(p.84) 같은.
그런데 여기에 나를 박장대소하게 만든 일본인 저자의 책을 한 권 더 추가해야겠다.


주인공은 어제부터 읽기 시작한 요네하라 마리의『차이와 사이』인데, 지난 2006년 지병으로 고인이 된 요네하라 마리는 고종석의 안내로 알게 된 (러시아어)통역사이자 작가. 마리의 책은 거의 대부분 마음산책에서 독점 출간되고 있는데 어지간히 다작을 했는지 끝도 없이 나오는 그녀의 책은 결국『발명마니아』를 끝으로 구입 포기. (나중에 반값 행사를 하면 그때 구입할까 생각.)
『차이와 사이』는 도서관 신착도서 칸에 있는 걸 '오, 횡재!' 냉큼 대출했는데, 살펴보니 원제가 'AI NO HOSOKU', 그러니까 '사랑의 법칙'이다. 원제를 그대로 써도 될 걸 아마도 부제로 붙인 '지식여행자의…' 어쩌구 때문에 좀 더 인문학적인 냄새가 풍기는 '차이와 사이'로 바꾼 듯. 여튼, 첫 챕터 제목이 바로「사랑의 법칙」인데, 다음은 나를 충격에 빠트린 첫 장, 첫 대목.

책으로 연구한 '사랑의 법칙'
내가 '사랑의 법칙'을 연구하기 시작한 때는 중학교 후반이었다. 이 분야에 상당히 흥미를 갖고 있어, 줄곧 섹스나 이성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당시는 텔레비전이 드물던 시절이라 관심사에 대한 정보를 제일 많이 모을 수 있는 수단이 책이었다. 책을 많이 읽는 나를 보고 부모님은 기뻐하셨지만, 나는 그쪽으로만 흥미가 있었던 터라『아라비안나이트』13권을 전부 읽었고, 그 밖에 명작이란 명작은 거의 다 훑었다.명작으로 알려진『삼총사』는 대부분 아동용으로 읽었을 텐데 원전을 보면 진짜 굉장하다. 온통 달타냥과 밀레디의 정사 장면이다. 그리고『장발장』(일본에서는『아, 무정』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이라는 제목으로 알고 있는『레 미제라블』, 이것도 아동용으로 보았을 텐데 성인용 원전을 읽으면 코제트의 엄마가 매춘을 했던 이야기가 자세히 나와 있다. - pp.13-14『차이와 사이』 


이럴수가! 그랬던 것이다. 어렸을 때 내 방 책장에 꽂혀 있던 세계명작동화는 아동용이었던 것이다. 미스터 걸리버야 그러려니 하지만 좌충우돌 정의로운 신념과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시골뜨기 기사인줄로만 알았던 달타냥 너마저!!! 당장 S에게 전화해서 이 페이지을 낭독해주고 포효했다. "성인용 삼총사를 다시 읽어야겠어!"


다니엘 글라타우어의『새벽 세 시, 바람이 부나요?』는 서간문 소설이긴 한데 이 서간이 특이하게 이메일이다. 이 소설의 장점은 뭐니 뭐니 해도 생생한 글대화에 있는데, 대화방에서 타인의 재미있는 채팅을 보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방심하고 있다 쿡- 웃음이 터지는 곳이 많은데 다음은 그 중 하나.





10분 뒤 Re:
레오, 그만 끝내죠. 당신이야말로 결정적인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넘어갔어요. 그 질문을 다시 한번 하죠. 레오, 저를 만나고 싶어요? 그렇다면 만나세요! 아니라면 앞으로 어떻게 할지, 혹은 이 관계를 지속하기는 할 것인지, 당신 입장을 얘기해보세요.

20분 뒤 Aw:
어째서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글로만 대화를 나눌 수는 없는 건가요?

2분 뒤 Re:
나의 메일 파트너가 나를 만나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납득할 수가 없어요. 구제불능 레오, 어쩌면 제가 가슴 큰 금발 여자일 수도 있잖아요!!!

30초 뒤 Aw:
그렇다고 제가 뭘 어쩌겠습니까?

20초 뒤 Re:
뚫어지게 보시구랴.

- p.117-118,『새벽 세 시, 바람이 부나요?』 



오랜만에『장정일의 독서일기』 2권과 3권을 읽었다. 정확히는 '구해서' 읽었다. '독서일기' 시리즈 중 품절-절판으로 구입을 못했던 이 두 권이, 글쎄 내가 모르는 사이 다시 출간되고 있는 게 아닌가. 얼른 주문, 소파 바로 옆 손을 뻗으면 가장 잘 닿는 책장에 꽂았다. 그리고 후루룩 맛있게 읽은 그의 독서일기는 역시 실망시키지 않는다. - 다만 3권은 시기가 그래서였겠지만『내게 거짓말을 해 봐』에 관한 작가의 해제(라고 해야 할지)가 (좀) 지나치다 싶게 등장한다.
그 중 재미있어서 색인을 해두었던 문장을 옮긴다.

(…전략)남성 에로시티즘의 분리적 성격과 여성 에로티시즘의 통합적 성격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예를 들면 이렇다. 남자는 여자가 아름답기만 하다면 그녀의 직업이 화장실 청소부라 할지라도 상관치 않는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가 아무리 동하게(?) 생겼다 할지라도 그의 직업이 그렇다면 동침하지 않는다. 에로티시즘을 앞에 놓고 남자는 여자의 사회적 지위/계층/신망/명성에 신경 쓰지 않지만, 여자는 그 반대. 남자는 여자의 얼굴, 궁극적으로는 성기만을 향해 돌진하지만('돼지 얼굴 보고 잡아 먹나?'), 여자에게 에로티시즘은 최종적인 고려사항에 불과하다.
남자는 자신의 성행위를 순간적인 도취로 여기지만 여자는 성적도취와 연애를 혼동한다. 남자의 육체와 영혼은 분리되어 있지만 여자에게는 분리되지 않는다. 하므로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의 손을 잡고 광장으로 나가고자 하며, 남자는 그녀를 밀실에 감추어 두고자 한다. 여자는 자신의 사랑을 공적인 영역으로 끌고 나가 확인하고 싶어하며 남자는 자신의 사랑을 사적인 영역 가운데 보존하려 든다. 여자의 에로티시즘은 시간적/공간적 지속을 원하며 미래를 건설하려고 들지만, 남자는 오히려 현실과 미래를 망각하기 위해 에로티시즘은 사용한다.(중략)
 


'예쁘기만 하면 되는' 남자의 에로티시즘을 이보다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늘 생각하지만 그의 독서세계는 참 대단하다. 자신의 생각을 개념화하고 개념화한 그것과 부합되는 가장 적확한 단어를 골라내어 말과 글로 완성한다는 건 참으로 부러운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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