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사레 파베세.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방에서 1908년 출생.
'이탈리아. 1908년 출생.'
이 두 개만으로도 충분히 함축적이고 상징적인 키워드가 아닌가.
'1980년대'가 대한민국의 한 시대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된 것처럼.
<나는 모두를 용서한다. 그리고 모두에게 용서를 구한다. 되었는가? 너무 수다를 떨지 않기를.>
『레우코와의 대화』역자 해설 중
어릴 때 TV에서 멋모르고 봤던 숱한 영화 중에는 시간이 지나도록 오래 기억에 남아 있는 영화가 몇 있는데 <흑인 올페>도 그 중 하나예요. 이 영화에 삽입된 '카니발의 아침'은 한국영화 <정사>의 OST로도 유명하지요.
보는 영화의 95% 이상이 헐리웃 영화에 편중된 지금이라면 아마 보지 않았을지도 모를, 아름답고 서정적이고 비극적인 이 영화를 넋 놓고 봤던 게 기억납니다.
사실 오르페우스 신화는 제겐 에우리디케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으로 가득합니다. 천신만고 끝에 마침내 하데스에게서 에우리디케를 빼내오는 오르페우스. 그러나 기척을 전혀 내지 않는 에우리디케가 자신을 잘 따라오고 있는 것인지 혹시 하데스가 자신을 속인 것은 아닌지 초조해지고 결국 지상의 입구에서 뒤를 돌아보고 맙니다. 그리하여 이 이야기는 결국 비극적인 엔딩을 맞이합니다.
때문에 저는 오랫동안 에우리디케는 오르페우스가 의심하지 않고 불안해하지 않도록 기척을 냈어야 했어! 라고 에우리디케를 원망하고 미워했어요.
그런데 파베세의 방식으로 신화를 비틀어 해석하는『레우코와의 대화』에 등장하는 오르페우스는 좀 다릅니다.
삶과 죽음을 통과하는 길을 건너면서 오르페우스는 생각합니다.
과거는 미래가 될 것이고, 예전의 삶은 다시 반복될 것이고 끝날 것이고... 또다시 반복될 것이고...
무(無)의 공허함이 오르페우스를 덮칩니다. 이윽고 지상의 입구에 다다랐을 때 오르페우스는 말합니다.
<이제 끝내자.>
그리고 뒤를 돌아봅니다.
생각해 보면 돌아본 건 오르페우스였지요. 이유야 어떻든...
에우리디케, 그동안 미안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