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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20:51
사랑이 스러지는 순간『태연한 인생』by 은희경 맑은 여름날이었다. 류의 어머니는 그날의 강렬한 햇살과 더운 바람을 또렷이 기억했다. 주인 부부는 친척집으로 외출했고 아침 일찍 청소를 마친 커다란 저택 안은 서늘한 정적뿐이었다. 어머니는 야무지게 매듭이 묶인 커다란 보퉁이와 함께 부엌 창가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숲 사이로 난 기다란 드라이브웨이로 들어오는 차를 이분 정도 볼 수있는 그 자리에 네시간째 앉아 있는 중이었다. 잘 손질된 정원에는 꽃들이 키와 색깔을 맞춰 피었고 결을 살려 꼼꼼하게 깎은 드넓은 안마당의 잔디는 초록색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햇빛이 강렬한 날이었다. 잔디밭에 떨어진 커다란 삼나무 그림자가 마치 검은색 레이스 탁자보를 펼친 것처럼 섬세하고 화려했다. 오후가 되면서 그림자는 모양과 색깔이 조금씩 변해갔으며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 때마다 순차적으로 부드럽게 물결쳤다. 잔디밭에 빛이 사선으로 들기 시작했다. 한때의 찬란함으로 조금씩 기울어가고 있었다. 류의 어머니는 오랜 시간 그 모든 것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간의 흐름과 길어지는 그림자속에서 어머니가 또 한가지 본 것은 자기 인생의 퇴락이었다. -p.13
아… 참 좋다…. 은희경이 이런 문장을 썼던가….
주문 전, 온라인서점에서 미리보기로 이미 읽었던 이 장면은 책을 받자마자 다시 읽어도 역시나 좋다. 초반부를 읽다 그녀의 예전 책을 뒤적여봐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비유하자면 첼로 독주만 하는 줄 알았던 연주자가 협주곡 협연도 하는구나... 하는 기분이랄까. 톡 쏘아붙이는 것 같던 새침한 문장으로만 기억하던 그녀가 이토록 낭만적인 서정도 쓰는구나.
가난한 유학생 시절, 남편 학업을 위해 부유한 백인가정에 입주가정부로 들어간 류의 어머니가 주말마다 데리러오는 아버지를 기다리는 이 짧은 장면에 오사무의 중편소설 제목 '사양'을 붙여주면 좋겠다 싶었다. 개인마다 인생의 정점은 제각각 다르겠으나 류의 어머니에게 인생의 정점은 아마 한 남자, 남편으로부터 맹목적인 사랑을 받았던 그때였을 것이다. 남편이 데리러 오기로 한 그날, 남편을 몇 시간째 기다리던 그날, 결국 오지 않은 남편을 기다리며 그녀는 자기 인생의 정점이 지나갔음을 깨닫는다. 그건 곧 사랑이 스러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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