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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e's Cask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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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舌)
- 네 언어의 한계는 곧 네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by Ludwig Wittgenstein
8493 bytes / 조회: 1,463 / ????.05.31 15:08
구두 속 모래 한 톨 같은 '안톤 체호프'


'완두콩 한 알을 숨긴 매트리스 위에서 자고 일어난 기분'.
체호프의 소설이나 희곡을 읽는 기분을 정의하면 더도 덜도 말고 딱 저러하다.
그럼에도 도서관에서 대출한 을유문화사 판 체호프 희곡선의 마지막 책장을 덮기가 무섭게 다른 출판사, 다른 번역자의 희곡 전집을 주문한 걸 보면 아무래도 콩 한 알의 불편함을 감수할만한 장점이 그 매트리스에는 있는 모양.



체호프 희곡 전집







그리고 오랜만에 해럴드 블룸의『독서 기술』에서 다시 만난 체호프. 블룸이 늘어놓는 체호프의 단편「키스」가 어찌나 매혹적이던지 '당장 읽어봐야겠다!'는 충동이 갈증처럼 일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고개가 갸우뚱-. 어, 집에 체호프 단편이 있는 것 같은데. 분명히 읽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부산에 있어 당장 확인은 못하고 인터넷에서 검색질만 열심히 하다 집에 오자마자 책장을 훑었더니 역시나 민음사 판『체호프 단편선』이 있다.



체호프 단편선





책을 확인하고 나니 우습게도 이 책을 읽은 기억이 '확실하게' 난다. 아울러 굉장히 무미건조하게 읽었던 감상도 희미하게 떠오르고. 이전까지 기억이 확실하지 않았던 건 아마도 누군가가 그토록 깊게 매료되었던 작가가 내겐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는 데서 오는 위화감 때문이었던 듯 싶다.
나는 별다른 감흥을 못 받았는데 블룸이 읽은 체호프는 어쩜 그렇게 매혹적일 수가 있는가. 혹시 그가 읽은「키스」는 다른가. 이쯤되니 이 단편을 무조건 읽어봐야겠다는 오기가 드는데 불행히도 민음사 판에는 체호프의 초기작인「키스」가 없다. 검색을 해보니 이 단편이 수록된 번역본이 있긴 하나 단편 하나 때문에 책을 사는 것이 망설여진다. 
연유는 모르겠지만(작가가 아닌 작품 별로 저작권이 등록되기라도 했는지) 국내에 번역된 체호프 단편은 출판사마다 목록이 엇갈리는데, 즉 체호프의 전집을 읽으려면 다른 출판사의 체호프를 각각 모아야 된다는 얘기. 그런 이유로 열린책들의 체호프를 이미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는데 단편 하나 때문에 다른 책을 또 사야하니 아무래도 망설이게 되는 것.
그렇다고 해도 아마 이대로였다면 해당 출판사의 책을 사고 말았을 것인데 우습게도 고민은 너무 쉽게 해결되었다.
집에 있는 창비의 세계문학단편선 중 '러시아 편'에 마침 문제의 단편이 수록되었던 것. 제목은「입맞춤」인데 사소한 호기심을 풀고자 찾아보니 러시아어 원제는 국내의 '입맞춤'이 아니라 블룸의 '키스'가 맞다.



창비 세계문학 단편선







마침내 체호프의「입맞춤(혹은 키스)」를 읽고 난 감상은 역시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든다.
기대를 품고 읽은 체호프의 단편은 그의 다른 단편을 읽었던 예전과 다르지 않다. 어쩌면 나를 사로잡은 건 체호프의 단편에 매혹된 블룸인지도 모르겠다. 방점을 '체호프'가 아니라 '해럴드 블룸'에 찍어야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참고로 블룸을 매혹시킨 체호프는 이러하다.

체호프의 초기작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키스The Kiss」로서 그가 스물일곱 살 때 쓴 작품이다. 리야보비치는 포병 여단에서 "가장 소심하고 재미없고 내성적인 장교"로서, 어느 날 저녁 은퇴한 장군의 시골 저택에서 열린 사교 모임에 동료 장교들과 함께 참석한다. 집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지루해진 리야보비치는 어느 어두운 방에 들어서고 모험을 경험하게 된다. 그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한 한 여인이 그에게 키스를 한 뒤 물러선다. 그는 서둘러 빠져나오고, 그 후 그 우연한 만남에 사로잡힌다. 그 만남은 처음에는 환희를 안겨 주었지만 곧 고통으로 바뀐다. 이 가련한 남자는 사랑에 빠진 것이다. 신원을 전혀 알 수 없고 다시 만날 가능성도 전혀 없는 여인과.
그의 포병대가 그 장군의 저택을 지나가게 되었을 때 리야보비치는 공중 목욕탕 근처의 작은 다리를 걷다가 빨래걸이에 걸려 있는 젖은 시트에 손을 뻗어 만진다. 차갑고 거친 감각이 그에게 엄습해 오고, 그는 강물을 내려다 보는데 거기에는 붉은 달이 비추고 있다.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다가 리야보비치는 인생이란 앞뒤가 맞지 않는 농담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이야기의 결말 부분에서, 다른 모든 장교들은 장군의 집으로 돌아갔지만 리야보비치는 홀로 잠자리에 든다.
키스 장면 이외에는 차갑고 축축한 시트를 만지는ㅡ말하자면, 키스와 반대되는ㅡ장면이 이야기의 결정적인 순간이다. 이 장면은 리야보비치를 파괴하지만, 키스도 마찬가지다. 희망과 기쁨은 아무리 비이성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절망보다는 강하며, 궁극적으로는 더욱 치명적이다. 나는「키스」를 읽으며 내가 예전에 체호프에 대해 쓴 글에서 지적한 점을 되뇌인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절망케 하리라." 이것이 체호프의 복음이다. 다만 이 우울한 천재는 유쾌하게 살 것을 고집했다. 리야보비치는 자신의 운명이 정해졌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분명 그렇지 앟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을 아는 일은 이 이야기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 p.42『독서기술』 


발췌를 옮기면서 발견한 건데 블룸이 읽은 '키스'와 내가 읽은 '키스'의 묘사-서술 부분이 미묘하게 다르다. 단적으로 블룸이 읽은 '공중 목욕탕 근처의 작은 다리 위 빨래걸이에 걸린 시트'가 내가 읽은 창비 판에는 '장군 댁 수영장과 다리 난간에 걸쳐진 시트'로 등장한다. 조금 멘붕...

분명한 사실은, 체호프는 이성이 아니라 감성으로 읽어야 된다는 점. 감성을 열고 읽을 때에 비로소 행간에 숨어 있는 쓸쓸함, 외로움, 삶의 아이러니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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