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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e's Casket
Review 1
설(舌)
- 네 언어의 한계는 곧 네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by Ludwig Wittgenstein
5481 bytes / 조회: 1,255 / ????.06.13 20:54
부엉이와 올빼미의 차이






이란 작가 사데크 헤데야트의 소설이 국내에 첫 출간되었는데(사진) 아이러니하게도 작가의 이력이나 소설이 아닌 '출간' 자체가 흥미를 끕니다.
공교롭게도 일주일을 두고 '문학과지성사'(이하, '문지')와 '연금술사'에서 출간되었는데, 문지는『눈먼 부엉이』로, 연금술사는『눈먼 올빼미』로 제목을 뽑았어요. (둘 다 양장이에요)
궁금해서 검색해 보니 부엉이와 올빼미는 일단 몸집이 다르고, 생김새도 같은 듯 다르네요. 가장 큰 차이는 머리 꼭대기에 귀모양의 털이 있고 없고인데, 귀모양 털이 있는 놈이 부엉이에요. 고로 연금술사 표지에 있는 놈은 '올빼미'.
제 경우 배수아 씨에게 그닥 호감이 없고, 반면 공경희 씨 번역에 그동안 불만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연금술사 판으로 사야지 생각하지만 그래도 두 책 모두 미리보기를 제공하고 있어 둘 다 읽어봤어요.
다음은 두 출판사 각각의 시작하는 페이지 첫 문단입니다.

삶에는 마치 나병처럼 고독 속에서 서서히 영혼을 잠식하는 상처가 있다.
하지만 그 고통은 다른 누구와도 나눌 수 없다.
타인들은 결코 그런 고통을 믿지 못하고 정신 나간 이야기로 치부할 뿐이다.
만약 누군가 그 고통에 대해서 묘사하거나 언급이라도 하게 되면, 사람들은 남들의 태도를 따라서, 혹은 신경 쓰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의심 섞인 경멸의 웃음을 지으며 무시해버리려고 한다.
아직 인간은 그런 고통을 치유할 만한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 배수아『눈먼 부엉이』

삶에는 서서히 고독한 혼을 갉아먹는 궤양 같은 오래된 상처가 있다.
이 상처의 고통이 어떤 것인가 타인에게 이해시키는 일은 불가능하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런 믿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을 '평범하지 않은 일'로 치부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누군가 이 고통에 대해 설명하거나 글을 쓴다고 해도 사람들은 세상의 상식이라든가 자신의 개인적인 믿음을 기준으로 의심하거나 냉소적인 태도로 그것을 대하려고 한다.
그런 몰이해의 원인은 인류가 아직 이 병에 대한 치료법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공경희,『눈먼 올빼미』



비록 번역이 제2의 창작이라고는 하지만 위 두 문장을 읽어 보면 어딘가 위화감이 느껴집니다.
사실 영문이나 일문의 경우는 번역문장을 읽다 보면 원문이 대충 감이 오거든요. 그런데 위 두 번역자의 문장은 원문이 영 감이 안 잡혀서 새삼 책을 살펴 보다 뒤늦게 이상한 점을 발견했어요. 원제가 궁금해 찾아 보니 연금술사에는 원제가 안 보이고 대신 문지의 표지에 'Die Blinde Eule'가 있더군요. 공경희 씨면 영어권 번역자라 당연히 판본이 영어권이겠거니 했는데 배수아 씨가 번역한 문지의 원제는 영어가 아닌 독어였던 거지요.
어라? 싶어 열심히 검색질을 한 결과 문지는 배수아 씨가 독일어판을 번역했고, 연금술사는 공경희 씨가 영어판을 번역했다는 사실을 알게됐어요.
1937년 인도에서 복사본 형태로 출간, 이란에서는 1941년에 이란 국내에 연재를 시작한 이후 재출간과 검열을 반복하다가 2006년에 금서로 지정되고 출판권을 정부가 몰수했다니 아마 이것이 작가의 자국어 판본이 번역되지 못한 배경인 듯합니다.

정리하면,
일단 번역 판본의 국가가 다르니 역자의 번역을 논할 일은 아닌 것 같아요. 한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역자가 판본의 원전에 충실했다는 가정 하에, 두 국가의 원문을 해석하는 차이를 간접적이나마 엿본 기분이 들었다고나 할까. 이를테면 '나병'과 '궤양' 같은. 이건 독일어와 영어의 차이인지, 독일어권 번역자와 영어권 번역자의 차이인지 궁금해집니다.
그나저나 IT산업이 첨단을 걷고 있고, '3차 산업혁명' 얘기가 나오는 21세기에 아직까지 이런 전제주의가 개인의 창작을 억압하는 사회(국가)가 있다니 무섭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고 그러네요. 무구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시대의 불행의 최전선에 서 있는 건 여전히 예술을 하는 이들, 그 중에서도 문학을 하는 작가들이라는 사실은 여전히 유효한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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